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이혜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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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탄장愁嘆場
시인 이혜선
오늘은 너를 만나러 *수탄장愁嘆場에 가는 날이다
소나무 아래 늘어서 있는 너의 옷자락이 어서 오라 나부낀다
바람 불어오는 쪽을 등지고
저만큼 떨어져서 네가 서고
너를 스쳐오는 바람을 맞으며 철조망 앞에 내가 선다
나의 병균이 바람에라도 실려 네게로 갈까 염려해서다
너를 어루만지고 내게로 불어오는 향그런 내음을
크게 들이마신다. 뭉그러진 코로
내 딸아, 싸늘한 바람의 손 아니라
따스한 네 손을 잡고 싶다
네 복숭아볼에 내 볼을 부비고 싶다, 살과 살이 닿고 싶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허공을 붙잡는다, 너의 꽃잎을 안는다
내 입술이 네 뺨에 닿기 전에 뭉그러지고 비뚤어져 버린다
내 딸아, 비뚤어진 입술로 나는
네 이름을 똑똑히 부를 수 없다
진물 흐르는 이 손으로 너를 안을 수는 더더욱 없다
진물 흐르는 이 발을 떼어 네게로 갈 수가 없다
가슴 가득 안았던 꽃잎을 놓아주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는 너를 바람에게 맡기고
빈손으로 나는
돌, 아, 선, 다,
겉보기엔 담담한 모습으로, 내 딴에는 잰걸음으로,
수탄장을 떠난다
*'수탄장 ㅡ 소록도 수탄장: 환자인 부모와 미감아 자녀가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곳.
◆ 이혜선李惠仙
1950년 경남 함안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세종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1년 월간 《시문학》 등단
-시집 『神 한 마리』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새소리 택배』 『흘린 술이 반이다』 등 6권
-저서 『문학과 꿈의 변용』 『이혜선의 명시 산책』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아버지의 교육법』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 평론상 등 수상,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2016)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한국세계문학협회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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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 시인의 시 〈수탄장〉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혜선 시인의 〈수탄장〉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선 시대적 비극과 인간적 애틋함을 시적 형상으로 응축한 작품이다.
시인은 1950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을 연구했으며, 시와 비평,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神 한 마리》,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를 비롯한 여러 시집과 저서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구원, 언어의 근원적 힘을 탐구했다.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삶과 문학의 진정성’을 실천한 그의 철학이 이 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수탄장'은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품은 장소다. 나병 환자인 부모가 철조망 너머로 아이를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바람 불어오는 쪽을 등지고 / 저만큼 떨어져서 네가 서고”라는 대목은 물리적 거리와 정서적 단절을 동시에 보여준다. 전염을 염려하여 스스로 거리를 두는 부모의 자기희생이 담겨 있다. 사랑을 향해 가고자 하는 본능조차 병과 낙인의 벽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 현실이 드러난다.
“너를 어루만지고 내게로 불어오는 향그런 내음을 크게 들이마신다”라는 구절에서는 다른 방식의 접촉이 열린다. 손과 입술이 닿을 수 없으니 감각의 끝인 호흡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육체의 한계를 넘어 영적 교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내 딸아, 비뚤어진 입술로 나는 / 네 이름을 똑똑히 부를 수 없다”라는 부분은 병이 남긴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 고백은 단순한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부를 수 없어도 존재하는 이름, 안을 수 없어도 남아 있는 진심이 인간적 진실로 환기된다. 이는 시인이 줄곧 지켜온 문학관과도 연결된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아픔 속에서 꿈과 변용을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빈손으로 나는 / 돌, 아, 선, 다”라고 맺는 대목은 절제된 종결이다.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내면에는 울분과 슬픔이 흐른다. 돌아섬은 체념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다. 이 절제된 어조가 오히려 강한 울림을 만든다.
이는 이혜선 시 세계의 중요한 미학적 특징이다. 감정의 과잉을 배제하고 절도 있는 언어로 깊은 울림을 일으키는 힘이다.《이혜선의 명시 산책》과 《문학과 꿈의 변용》에서 보여준 비평가로서의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수탄장〉은 인간이 고통과 단절 속에서도 어떻게 사랑을 지켜내는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가장 깊은 상처를 언어로 변환하여 독자로 고통 너머의 휴머니즘을 마주하게 한다. 그의 삶과 문학이 지향해 온 존재의 구원과 언어의 힘이 작품 속에 응축되어 있다.
이 시는 단순한 체험담을 넘어 인간 존엄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품은 성취다.
이혜선의 시 세계는 고통을 가리지 않는다. 그 속에서 인간을 지탱하는 사랑과 신념을 언어로 드러낸다. 〈수탄장〉은 그의 가치철학과 작품 의식이 응축된 대표적 성과이며, 한국 현대시사에 남을 증언이자 시적 진실의 결정체다.
―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