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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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
기다림은 미세한 감정의 진폭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설렘이 심장의 고동을 빠르게 한다면, 불안은 그 고동을 무겁게 늘어뜨린다. 같은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은 끊임없이 앞서 달리거나 뒤로 주저앉는다. 이처럼 기다림은 육체가 머무른 자리를 넘어, 정신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과정이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내면과 직접 마주한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불안 기질이나 의존 욕구가 기다림 속에서 선명해진다. 조금만 늦어도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내면의 안전지대가 상대적으로 좁은 것이고, 긴 시간에도 담담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관계에 대한 신뢰의 기반이 넓은 것이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 인간 심리의 민낯을 드러내는 시험대다.
또한 기다림은 언어 이전의 몸의 반응으로 드러난다.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고, 발끝이 조급하게 움직이며, 시선이 길목을 맴돈다. 이 무의식적 행동들은 마음이 만든 신호다. ‘기대한다’와 ‘염려한다’는 감정이 동시에 작동할 때, 몸은 더 이상 고요히 있지 못한다. 기다림은 이렇게 심리와 신체가 교차하며 빚어내는 총체적 체험이다.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상상과 현재의 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을 두고 마음은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그려낸다. 그 상상 속에서 인간은 최선과 최악을 동시에 준비한다. 하지만 이 준비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불확실성 자체를 다루는 훈련이 된다. 결국 기다림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울러 기다림은 관계를 지탱하는 예의이기도 하다. 약속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 있는 행위는 타인을 존중한다는 무언의 표현이다. 설령 그 시간이 길어져 불안이 쌓인다 해도, 끝내 자리를 지키는 태도 속에는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따라서 기다림은 심리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신뢰의 기초를 이루는 행위다.
기다림은 또한 인간의 시간 인식 방식을 드러낸다. 객관적으로는 동일한 10분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어떤 이에게 한 시간처럼 길고, 또 어떤 이에게는 짧은 순간처럼 지나간다. 이는 기다림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그 시간에 부여한 의미의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다림은 결국 의미를 머금은 시간이다.
이렇듯 기다림은 불안과 설렘이 교차하는 감정의 심연이며, 관계의 신뢰를 시험하는 자리이고,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훈련이며, 인간의 시간 의식을 드러내는 장치다. 기다리는 자리는 단순히 상대의 발걸음을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확인하는 내면의 무대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