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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서리하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감을 서리하다





감나무 한 그루 없던 집, 그 서운함이 아이들 마음엔 늘 구멍 하나로 남아 있었다. 마당가에 감이 주렁주렁 달린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그 열매는 계절의 보물처럼 반짝였다. 우리 집에는 그 보물이 없었다. 그러니 눈길은 늘 옆집 텃밭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그곳이 욕쟁이 할매와 혹부리 할배네 밭이었다.

할매는 성질이 불 같았다. 고양이가 지붕만 스쳐도 “에그 저 요망한 것!” 하고 욕을 퍼부었고, 닭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잡히기만 해 봐라!” 하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할배는 혹부리 하나 달고 다니며, 늘 콧소리를 섞어 “에헴” 하고 기침을 해댔다. 아이들 눈에는 마치 도깨비 부부 같았다. 그런 집에 몰래 들어가 감을 따먹는다니, 그 아슬아슬한 모험이야말로 가슴 뛰는 놀이였다.

달빛이 마당을 덮는 밤이면 우리는 작전회의를 했다. “할매가 부엌에서 설거지 소리 안 나면 지금이다.” “할배 기침 멎었을 때 달려라.” 눈치껏 숨을 고르며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달빛 속 감나무는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감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조차 심장 박동처럼 크게 들렸고, 감을 따서 품에 넣는 순간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덜 익은 감은 떫어 혀가 오그라들고, 익은 감은 달아 이마까지 환해졌다. 그 맛이야말로 몰래 따먹었기에 더욱 꿀 같았다. 아이들은 서로 “너 이빨 시커메졌다!” 하고 깔깔대며 웃었다. 혹시라도 들키면 어찌하나 싶은 두려움과, 들키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뒤섞여 그 밤은 언제나 짜릿했다.

신기하게도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들켰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신 건 아닐까. 이튿날 할매는 밭일하다가 “감이 요새 귀신처럼 사라지네.” 하며 혀를 찼고, 할배는 “어쩌다 감나무가 애들 배 채우는구먼.” 하며 껄껄 웃었다. 그때 우리는 모른 척 웃음만 참고 있었다. 아이들의 비밀이 사실은 어른들의 너른 품 속에서 지켜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욕쟁이 할매도, 혹부리 할배도 세상에 없다. 텃밭은 삭아 사라지고, 그 자리엔 집들이 들어섰다. 달빛 아래 감서리 하던 기억은 아직도 입안에 감미롭게 맴돈다. 떫기도 하고 달기도 했던 그 맛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용기와 어른들의 은근한 배려가 뒤섞여 있었음을 이제야 안다.

감나무 하나 없던 우리 집 아이들이, 욕쟁이 할매와 혹부리 할배 덕분에 달빛 속에서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감 하나에 담긴 해학과 정겨움, 그 추억은 지금도 감보다 달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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