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조병기, 허형만, 임병호, 정순영 시인의 제8 시집
《석양의 뒷모습》
□ 왼쪽부터 허형만, 조병기, 유병호, 정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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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뒷모습〉
― 한국 현대시사 속에서의 의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들어가는 말
문학사적 맥락 속의 석양
한국 현대시는 늘 거대한 시대의 파도와 더불어 움직여왔다. 해방의 혼돈과 전쟁의 폐허, 산업화와 민주화의 물결, 그리고 오늘의 디지털 전환에 이르기까지, 시는 시대를 기록하는 언어이자 그 시대를 넘어서는 영혼의 호흡이었다. 어떤 시인은 시대의 상처를 꿰매는 의술처럼 언어를 사용했고, 어떤 시인은 시대를 향한 저항의 횃불로 시를 들었다. 또 어떤 이는 고요한 자연과 일상의 결을 통해 세월을 증언했다. 이처럼 한국 현대시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수많은 길이 교차하며 형성된 역사다.
그 역사 속에서 〈석양의 뒷모습〉은 단순히 한 권의 시집으로 읽히지 않는다. 네 명의 원로 시인이 나이 여든을 넘기고도 여전히 시의 언어를 붙들어 모아낸 기록이자, 한 세대가 남긴 집단적 문학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조병기, 허형만, 임병호, 정순영. 이 네 이름은 각기 다른 궤적을 지녔지만, 모두가 한국 시단을 반세기 이상 지탱해 온 기둥과도 같은 존재다. 그들이 남긴 언어는 각기 다르다. 조병기는 자연의 숨결을, 허형만은 생활의 자리와 노동의 땀을, 임병호는 노년의 감각과 성찰을, 정순영은 신앙과 영성의 빛을 담아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결의 시선들이 석양이라는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것은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화음이 된다.
석양은 하루의 끝이자 동시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지는 해가 남긴 붉은 잔광은 사라짐이 아니라 완성의 표지이며, 그 뒷모습은 소멸이 아니라 다음 날을 여는 여명이다. 네 시인이 공통의 제목으로 삼은 석양은 바로 이러한 삶의 황혼과 시적 성숙을 상징한다. 젊음의 치열을 지나 세월의 무게를 안고도 여전히 시를 붙드는 태도는, 한국 현대시의 품격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집은 한 세대 시인들의 합동 성취이자, 문학사 속에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집단적 서정’이다. 그것은 개인의 서정시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낸 네 명의 시인이 공동으로 써 내려간 언어의 연대기이며, 문학사적 의미로는 한국 현대시의 구술사이자 서정사라 할 수 있다. 〈석양의 뒷모습〉은 저물어가는 순간에 남긴 빛을 통해, 오히려 시가 지닌 근원적 의미 ― 삶을 견디고 위로하며, 세월을 증언하는 힘 ― 을 다시 새기게 한다.
네 시인의 대표작 한 편씩을 선정하여,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과 작품의 미의식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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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시인 조병기
외출에서 돌아온 날 밤
귀뚜라미 혼자서
빈방을 지켜 주었다.
섬돌 풀숲도 아닌데
옷장 뒤에서 빈방을 지켜 주었다.
고놈 참 기특하게도
가을을 물고 와
빈방에 가득 풀어놓는다.
함께 놀다가 잠든 사이
부뚜막 어둔 자리 잡아
자장가를 불러준다.
□ 조병기 시인 시 〈귀뚜라미〉
― 자연 서정의 계보와 현대적 변주
조병기의 시 〈귀뚜라미〉는 한국 자연 서정의 맥을 잇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된 작품이다. 전통적으로 자연 서정은 사계절의 풍경과 그 속의 작은 생명들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투영해 왔다. 그러나 조병기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고독을 감싸고 삶을 위로하는 내밀한 동반자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학은 단아한 전통과 현대인의 내면을 아우르는 독자적 자리를 마련한다.
첫 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외출에서 돌아온 날 밤 / 귀뚜라미 혼자서 / 빈방을 지켜 주었다.” 시인은 귀뚜라미의 울음을 빈방에 들여놓으며, 쓸쓸함의 공기를 순식간에 전환한다. 귀뚜라미는 시인의 눈에 단순한 곤충이 아니다. 인간이 부재했던 공간을 홀로 채우고 지켜주는 존재, 즉 고독의 문지기다. 이 장면은 한국적 자연 서정이 지닌 고요와 겸허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도시적 삶의 고독을 함께 드러낸다. 자연과 인간이 멀어진 시대에 귀뚜라미는 여전히 빈방을 지켜주는 ‘사소한 위안’으로 다가온다.
둘째 연의 “섬돌 풀숲도 아닌데 / 옷장 뒤에서 빈방을 지켜 주었다”는 장면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본래 풀숲에 있어야 할 귀뚜라미가 옷장 뒤로 밀려 들어왔다. 이는 곧 자연이 도시 공간 속에서 쫓겨나듯 살아가는 현실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 상황을 애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옷장 뒤에서 울며 빈방을 지켜주는 귀뚜라미에게 ‘기특하다’는 감각을 부여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조병기의 문학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상실된 자리에서 절망을 말하지 않고, 남은 자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자연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과 공존하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셋째 연은 작품의 정점을 이룬다. “고놈 참 기특하게도 / 가을을 물고 와 / 빈방에 가득 풀어놓는다.” 귀뚜라미의 작은 울음이 계절 전체를 불러오는 힘을 지녔다. 시인은 소리를 통해 가을의 무늬를 체감하고, 빈방은 이제 쓸쓸한 공간이 아니라 계절이 깃든 방으로 변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적 비약이다. 한 마리 곤충의 소리가 ‘가을 전체’를 물어다 놓는 장면은 전통적 서정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는 자연과 인간, 부분과 전체를 하나로 엮는 시인의 직관이며, 작은 것에서 큰 것을 길어내는 문학의 힘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 “함께 놀다가 잠든 사이 / 부뚜막 어둔 자리 잡아 /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따스한 결구로 마무리된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더 이상 곤충의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부뚜막의 온기처럼 다가와 시인을 달래는 자장가가 된다. 이 순간, 자연은 인간의 내면에 스며들어 고독을 덮고 위안을 건넨다. 시인은 자연을 단순히 관조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인간적 관계로 끌어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동반자로 승화시킨다.
조병기의 작품 미의식은 바로 이 절제와 담백함에서 빛난다. 화려한 수식이나 장식 없이, 그는 작은 존재의 울음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면서도 깊고, 그 담백함이 외려 오래 남는 울림을 만든다. 이는 조지훈이나 박목월의 자연 서정을 계승하면서도, 오늘날의 고독한 도시인을 향해 다시 열어놓은 시학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귀뚜라미〉는 단순히 가을의 정서를 그린 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여전히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임을 증명하는 시적 증언이다. 빈방을 지켜주는 작은 곤충의 소리 속에, 시인은 삶의 근원적 위안을 발견한다. 이는 곧 그의 가치철학이기도 하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니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동반자라는 신념이다.
요컨대, 조병기의 시학은 작은 것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고, 사소한 소리에서 인생의 위안을 길어내는 데 있다. 〈귀뚜라미〉는 바로 그 철학이 투명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가을밤 귀뚜라미의 울음은 이제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독을 덮고, 세월의 빈방을 지켜주는 문학의 자장가다. 그리고 이 자장가야말로 조병기가 평생 지켜온 자연 서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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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부부
시인 허형만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세탁소 부부는 시인입니다
육체를 빠져나온 상처 난 영혼을
날마다 다리고 꿰매고 수선하는
세탁소 부부는 참 부지런한 시인입니다
□ 허형만 시인의 시 〈세탁소 부부〉
― 생활 서정의 확장과 노동의 시학
허형만의 시 〈세탁소 부부〉는 일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피어난 서정이다. 아파트 단지 안의 작은 세탁소, 그 안에 있는 부부의 노동을 그는 단순한 생활 묘사로 담지 않는다. 시인은 “세탁소 부부는 시인입니다”라는 단정으로 시작해, 그들의 손길을 영혼을 어루만지는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킨다. 생활의 바닥에서 길어낸 언어가 문학적 숭고에 이르는 순간, 우리는 허형만 시학의 정수를 마주한다.
첫 구절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 세탁소 부부는 시인입니다”는 시인의 시선을 명확히 드러낸다. 여기서 ‘시인’은 직업적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성실히 가꾸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는 행위를 가리키는 은유다. 허형만에게 시인은 반드시 언어를 다루는 자만이 아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묵묵히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이들을 시인이라 부른다. 문학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그의 철학은 바로 이 첫 구절에서 단단히 각인된다.
둘째 연의 “육체를 빠져나온 상처 난 영혼을 / 날마다 다리고 꿰매고 수선하는”이라는 구절은 시의 핵심이다. 옷에 묻은 얼룩과 구김은 단순한 물질적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상처이며, 인간이 살아오며 남긴 고통의 표식이다. 세탁소 부부는 매일 그것을 다리고 꿰매며 다시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되살린다. 시인의 눈에 이 행위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영혼의 회복을 돕는 시적 행위로 비친다. 노동은 곧 치유이고, 치유는 곧 시다. 허형만의 생활시학은 이렇듯 생활의 사소한 행위를 시적 가치로 격상시킨다.
셋째 연에서 시인은 “세탁소 부부는 참 부지런한 시인입니다”라 단정한다. 여기서 ‘부지런함’은 단순한 성실을 넘어, 반복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삶의 무늬를 어루만지는 끈질긴 헌신을 의미한다. 세탁소 부부의 하루하루는 동일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타인의 삶과 시간이 묻어 있다. 시인은 바로 그 반복의 성실함에서 문학의 본질을 본다. 시란 결국 인간의 상처를 기록하고 어루만지며,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네는 작업이 아니던가.
허형만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생활 서정의 확장에서 빛난다. 그는 시적 소재를 멀리서 찾지 않는다. 세탁소, 지팡이, 택배와 같은 구체적 사물들, 우리의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그의 시 속에서 존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는 1970~80년대 한국 시단에서 중요한 전환을 이룬다. 당시 한국 시는 모더니즘의 추상적 언어와 민중시의 이념적 언어로 양분되어 있었다. 허형만은 그 사이에서 ‘생활의 자리’를 붙들었다. 이 자리야말로 인간의 숨결이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곳이며, 삶의 본질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었다.
〈세탁소 부부〉는 그 철학의 정수다. 이름 없는 이웃의 노동을 시적 숭고로 끌어올림으로써, 허형만은 생활의 언어로 인간의 존엄을 노래한다. 그의 시는 삶의 낮은 자리를 존중하며, 그 자리에서 빛나는 인간적 성실을 발견한다. 노동은 단순한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창조적 행위다. 이와 같은 시인의 응시는 한국 현대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것은 “생활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문학적 성취다.
〈세탁소 부부〉를 읽는 독자는 깨닫게 된다. 시란 거창한 언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옆에서 묵묵히 구김을 펴주고 상처를 꿰매주는 손길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허형만은 시를 멀리서 찾지 않고,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존엄의 언어로 옮겨 놓는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자리와 맞닿은 가장 따뜻한 형식이 된다.
결국 허형만의 시학은 생활을 존중하는 철학에서 비롯된다. 삶은 곧 시이며, 노동은 곧 예술이다. 그의 시는 인간에 대한 존중, 노동에 대한 경의, 그리고 일상의 자잘한 순간 속에서 발견되는 숭고를 말없이 증언한다.
〈세탁소 부부〉는 짧은 시편이지만, 그 속에는 허형만 시학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세탁소의 작은 불빛 아래서, 시인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문학의 본령은 결국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구겨진 영혼을 다시 펴주는 데 있다고. 그것이 바로 허형만이 평생 지켜온 문학적 미의식이며,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자 한 삶의 가치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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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귀
시인 임병호
백로白露 무렵
뜨락 풀잎에
이슬 내리는 소리 들린다
들녘 곡식들
영글어가는 소리
금빛 노래
산문에서 바라보면
나뭇잎들이 시나브로
붉게 물들어가는 소리
사람이 늙으면
세월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귀가 밝아진다
□ 임병호 시인의 시 〈노년의 귀〉
― 노년의 시학과 감각의 전환
임병호의 시 〈노년의 귀〉는 인간의 생애 주기 속에서 노년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통적으로 노년은 소멸과 쇠락의 은유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임병호는 그 오랜 관습을 거부하고, 노년을 또 하나의 충만한 감각으로 전환시킨다. 그의 시에서 늙음은 결핍이 아니라 새롭게 열린 청각이며, 세월을 통과한 이에게만 주어지는 내적 울림이다.
첫 구절 “백로 무렵 / 뜨락 풀잎에 / 이슬 내리는 소리 들린다”는 시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독자를 고요한 사색으로 이끈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누구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그것이 ‘소리’로 들린다는 표현은 노년의 감각이 지닌 특별함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청각이 아니라, 삶을 오래 견뎌낸 영혼만이 감지할 수 있는 심연의 울림이다. 눈으로 보는 세계가 아니라 귀로 듣는 세계, 즉 내면의 감각으로 열린 세계가 노년에 도달한 이에게만 허락된다는 시인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둘째 연은 “들녘 곡식들 / 영글어가는 소리 / 금빛 노래”라는 구절로 이어진다. 곡식이 영글어가는 과정은 보통 눈으로 확인하는 풍경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소리로 전환한다. 곡식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내는 미세한 움직임을, 삶의 세월이 빚어낸 노래로 듣는다. 여기서 ‘금빛 노래’는 세월의 결실이자 성숙의 은유다. 임병호의 시학은 노년을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결실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데 있다. 청춘의 빛은 이미 저물었으나, 그 빛은 다른 방식으로, 더 은은하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셋째 연의 “나뭇잎들이 시나브로 / 붉게 물들어가는 소리”는 감각의 전환이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다. 나뭇잎이 붉게 변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시각의 영역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소리’로 표현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감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청각은 시각을 대신하고, 세월의 변화는 소리로서 느껴진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건너며 얻게 되는 새로운 감각의 증거이며, 나이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한 심미적 인식이다.
마지막 연은 시 전체의 철학적 진술을 집약한다. “사람이 늙으면 / 세월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 귀가 밝아진다.” 시인은 노년의 경험을 결핍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세월의 본질을 더 깊이 감각할 수 있는 시기로 전환한다. 젊음은 강렬한 빛으로 사물을 보았다면, 노년은 고요한 귀로 세월을 듣는다. 이 구절에서 임병호의 삶의 가치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이 듦은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세월의 무늬를 더욱 명징하게 듣게 되는 시간이라는 것. 귀가 밝아진다는 말은 단순히 청력이 회복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세월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의미다.
임병호의 작품은 노년을 긍정하는 드문 문학적 시도다. 한국 현대시에서 노년은 흔히 고독, 병, 상실의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가치를 발견한다. 노년은 새로운 감각의 탄생이며, 인생의 본질에 다가가는 시간이다. 이 철학은 그가 평생 살아낸 삶의 궤적과도 맞닿아 있다.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투명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귀를 얻은 것이다.
〈노년의 귀〉를 통해 우리는 ‘나이 듦’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새롭게 사유하게 된다. 늙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깊어짐이며, 고독이 아니라 충만이다. 시인은 작은 소리들, 이슬 맺히는 소리와 곡식이 여무는 소리, 나뭇잎이 붉어지는 소리를 통해, 인생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들리는 진실을 전해준다. 그것은 세월의 고운 선율, 인간이 평생을 걸어 마침내 얻게 되는 마지막 음악이다.
요컨대, 임병호의 시학은 노년을 삶의 황혼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맑고 깊은 순간으로 세운다. 그의 언어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절제된 언어 속에서 독자는 세월의 무게와 동시에 그 무게가 빚어낸 빛을 느낀다. 〈노년의 귀〉는 우리에게 말한다. 인생의 끝자락에도 여전히 새로운 소리가 있고, 그 소리는 세월이 남긴 가장 투명한 음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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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산책
시인 정순영
마른 겨울나무 가지에 이슬이 맺히니
하늘 깊은 곳에서 영롱한 빛살이 훈풍을 데리고 오네
겨우내 움츠렸던 땅의 우울은 가라
사람들의 언 마음 아래로 희망의 시냇물이 조잘거리고
무심한 나그네도 교회당 종소리에 양심의 손을 얹고 회개하네
연초록 착한 마음들이 고샅길 언덕에서 여명을 머금고
기도하는
봄은 발목에 이슬을 적시는 하나님의 산책인가 보다
언덕과 들을 가로질러 푸닥거리는 새들이
새싹 연두 붉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눈부시게
파란봄 하늘을 찬양하네
새 생명의 숨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리네
□
정순영 시인 시 〈하나님의 산책〉
― 영성시학과 초월의 언어
정순영의 시 〈하나님의 산책〉은 계절의 풍경과 신앙적 사유가 결합하여 빚어진 한 편의 영성 서정시다. 시인은 단순한 봄의 변화를 묘사하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발걸음으로 느끼며 초월의 현존을 체험한다. 이 시에서 신앙은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삶 속에서 감각되는 생명의 숨결이며,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영혼의 무대다.
첫 구절 “마른 겨울나무 가지에 이슬이 맺히니 / 하늘 깊은 곳에서 영롱한 빛살이 훈풍을 데리고 오네”는 시적 시선의 방향을 명확히 드러낸다. 겨울의 고단함을 견딘 나무에 맺힌 작은 이슬, 그 투명한 순간에 시인은 이미 신의 은총을 본다. 빛살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위로이며, 움츠린 땅을 다시 일으키는 초월의 손길이다.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이 신앙의 징표가 되는 순간, 시인은 자연과 초월을 하나로 엮어낸다.
이어지는 구절 “사람들의 언 마음 아래로 희망의 시냇물이 조잘거리고 / 무심한 나그네도 교회당 종소리에 양심의 손을 얹고 회개하네”는 종교적 체험을 일상의 장면과 결합시킨다. 교회당의 종소리는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넘어, 방황하는 나그네마저 멈추게 하고 마음을 돌려세운다. 신앙은 특정 공간이나 의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길을 걷는 자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잊고 있던 양심을 흔들며, 인간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순영의 문학적 미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초월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고, 신앙을 삶의 장면에 스며들게 한다.
세 번째 연에서 “연초록 착한 마음들이 고샅길 언덕에서 여명을 머금고 기도하는 / 봄은 발목에 이슬을 적시는 하나님의 산책인가 보다”라는 구절은 작품의 중심부이자 백미다. 봄을 하나님의 산책으로 형상화한 순간, 계절은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 신의 현존으로 변모한다. 발목에 적시는 이슬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자취가 남긴 은총의 흔적이다. 시인은 초월을 먼 하늘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의 고샅길, 언덕 위의 새벽, 발목에 스치는 이슬 속에 두며, 하나님이 인간의 삶 가까이서 거니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이 대목에서 정순영의 영성시학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부분 “푸닥거리는 새들이 새싹 연두 붉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 눈부시게 파란 봄 하늘을 찬양하네 / 새 생명의 숨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리네”는 생명 찬가로 이어진다. 새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찬양의 합창이며, 하늘과 땅을 잇는 성가다. 정순영의 시에서 봄은 종교적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신의 산책이자 생명의 현현으로 자리한다.
〈하나님의 산책〉은 종교적 신앙과 자연 서정이 합쳐진 드문 성취다. 한국 현대시에서 신앙의 언어는 흔히 교리적·설교적 성격에 머무르기 쉽다. 그러나 정순영은 그것을 삶의 언어로 바꿔낸다. 그는 가족과 사랑, 일상과 풍경 속에 신앙을 심어 넣고, 그곳에서 인간과 신의 거리를 좁힌다. 신은 멀리 있는 초월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동행자다.
정순영의 작품세계는 김현승이 보여준 기독교적 서정 전통과 닿아 있으면서도, 훨씬 더 인간적인 친밀함을 품고 있다. 그는 교리의 높음보다 삶의 낮음을 택했고, 추상적 초월보다 구체적 사랑과 희망을 노래했다. 〈하나님의 산책〉은 바로 그 미학의 결실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단순한 종교시가 아니라, 자연과 신앙, 삶과 초월이 한 자리에 어우러진 영성의 언어다. 봄은 하나님의 산책이고, 이슬은 은총의 흔적이며, 새들의 울음은 찬양의 합창이다. 정순영은 우리에게 말없이 전한다. 초월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발목을 적시는 이슬 속, 고샅길 언덕의 새벽 속,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이미 거닐고 있다고.
□ 맺음말
― 삶의 뒷모습에 서린 빛
〈석양의 뒷모습〉 합동시집은 네 명의 시인이 서로 다른 삶의 지평에서 건져 올린 내면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국 현대시의 다층적 풍경을 보여주는 귀한 증거다. 김경옥은 교단의 긴 세월을 거쳐 인생의 원숙을 시조라는 그릇에 담아냈고, 조병기는 자연 서정의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잇는 데 성공하였다. 허형만은 생활의 바닥에서 존엄을 건져 올리며 생활서정의 지평을 확장했고, 임병호는 노년의 귀를 통해 쇠락을 충만으로 바꾸는 시학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정순영은 신앙과 자연, 인간의 삶을 엮어 영성의 언어를 현대 서정으로 끌어내렸다. 이 다섯 개의 흐름은 개별 시인의 성취를 넘어, 우리 시대 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방향을 동시에 비추고 있다.
첫째, 이 합동시집은 삶의 구체성을 중시한다. 하늘이나 이념의 높음보다 발밑의 흙, 일상적 사물, 사람의 얼굴을 담아내며, 그것을 시의 본령으로 삼는다. 김경옥의 ‘감나무 끝 달빛’은 교사의 삶에서 길어낸 성찰이었고, 허형만의 ‘세탁소 부부’는 평범한 노동을 존엄으로 세운 노래였다. 시는 고상한 추상보다 생활의 바닥에서 더 깊은 울림을 얻는다는 점이 다시 확인된다.
둘째, 이 시집은 감각의 전환을 보여준다. 임병호가 들려준 “노년의 귀”는 육체의 쇠락을 새로운 감각의 열림으로 변주했다. 늙음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시간의 흐름을 듣는 귀는 젊음이 미처 알지 못한 세계를 열어준다. 이는 노년을 주제로 한 시학의 지평을 넓히는 성취라 할 수 있다.
셋째, 이 시집은 초월의 언어를 품고 있다. 정순영의 〈하나님의 산책〉에서 보듯, 자연은 곧 하나님의 발자취이고, 새들의 지저귐은 찬양의 합창으로 변한다. 신앙은 먼 교리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발목을 적시는 이슬 속에 살아 있다. 이는 한국 현대시가 종교적 언어를 삶 속으로 어떻게 끌어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넷째, 이 합동시집은 전통의 계승과 변주를 이룬다. 조병기는 조지훈과 박목월의 자연 서정을 잇되, 그것을 현대인의 고독 속으로 끌어왔다. 백로와 추분 사이의 계절 감각은 전통적 시조미학의 바탕 위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시인은 옛것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오늘의 삶에 맞게 변형시킴으로써 전통의 현재성을 확보한다.
이 네 명의 시인에게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란 결국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체득한 성찰, 자연을 벗 삼아 얻은 서정, 생활 현장에서 길어낸 존엄, 노년의 귀로 들은 시간의 노래, 신앙 속에 머문 영성의 기도. 이 모든 것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삶의 뒷모습 속에서 빛을 본다”는 태도다.
석양의 뒷모습이란 단순한 해 질 녘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뒷모습, 세월의 잔영, 시간의 그림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그 뒷모습 속에서 소멸이 아니라 빛을 본다. 감나무 끝에 걸린 한가위 달빛, 빈방을 지켜주는 귀뚜라미의 울음, 부지런한 세탁소 부부의 손길, 노년의 귀에 들려온 세월의 노래, 발목을 적시는 하나님의 산책. 이 모든 이미지들은 “뒷모습 속의 빛”을 보여준다. 그것은 허무가 아니라 충만이며,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문학사적으로도 이 시집은 의미 있는 지점을 점유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는 모더니즘과 민중문학, 참여시와 순수시로 분기되어 다양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 시집은 거대 이념보다 작은 삶의 자리, 초월보다 일상, 결핍보다 충만을 선택한다. 이는 시대적 피로를 넘어서는 치유의 언어이며, 앞으로의 시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다.
요컨대,〈석양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뒷모습은 결코 쓸쓸한 그림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 삶의 빛이 응축되어 있다. 시인은 그 빛을 포착하고, 독자에게 건네는 자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 일은 곧 “삶의 뒷모습에서 빛을 발견하는 일”이며, 그것이 시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