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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그 물빛 아래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고향, 그 물빛 아래




청람 김왕식




바람의 뿌리가 닿는 곳,
그곳이 나의 첫 이름이었다.
먼 들의 풀잎들은 아직도
어린 날의 숨결을 기억하고,
개울은 내 발목을 스치며
흐르는 시간의 맥박을 잇는다.

돌담 위로 저녁 햇살이
누이의 머리칼처럼 흘러내리고,
장독대 옆에 앉은 고양이의 눈빛엔
늦여름 달빛이 눕는다.
그때의 나는 아직 낡지 않은 별이었고,
세상은 모든 슬픔 이전의 노래였다.

논둑길을 따라 걷던 바람은
지금도 내 어깨에 앉아
한때의 기억을 털고 있다.
바람은 말을 잊고
말은 눈물이 되었다.
그 눈물로 피어난 한 송이 들꽃이
지금의 나를 부르고 있다.

고향은 지도에 없다.
그것은 가슴속에서만 반짝이는 물결,
한 사람의 생이 흘러간 자국이다.
우물가의 물은 이미 말랐으나
그 물빛은 내 시 속에서 아직 살아 있다.
그리움이란, 다만
사라진 것을 부르는 용기의 다른 이름.

달빛은 그때처럼 고요히 마당을 쓸고,
늙은 감나무는 여전히 저를 흔들며
누군가의 이름을 떨어뜨린다.
그 이름이 바로 나였고,
내가 그 이름을 되불러
하늘 끝으로 올려 보낸다.

고향이란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길이었다.
물소리와 별빛이 어깨를 맞대고
기도처럼 흘러간다.
나는 그 물 위에 시를 띄운다 —
이름 없는 나룻배 하나,
영혼의 강을 건너는
한 줄기 고향의 물빛으로.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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