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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즈음하여 — 세종께 드리는 부끄러운 편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슬픈 세종대왕





한글날을 즈음하여
— 세종께 드리는 부끄러운 편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가을 하늘이 높고 맑은 이 계절, 세종대왕의 숨결이 스민 10월이 다시 찾아왔다.
575년 전, 백성을 향한 위대한 사랑으로 창제된 ‘훈민정음’은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며 세계가 찬탄하는 문자로 자리했다. 그날의 빛이 오늘의 우리 언어를 있게 했으니, 한글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인간 존엄과 소통의 역사를 새기는 날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언어 현실을 돌아보면, 그 숭고한 정신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렵다.

세종께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펴지 못하니, 이를 가엾게 여겨 글자를 만든다” 하셨건만, 정작 그 후손들은 스스로 언어를 헝클어뜨리고 있다. 스마트폰 자판 위에서 태어난 기형적 약어들—‘ㅋㅋ’, ‘ㄱㄱ’, ‘ㅇㅋ’, ‘ㅎㅇ’—은 이제 문장이라 부르기조차 어렵다. 생각보다 손가락의 편의가 앞서고, 의미보다 습관이 앞서며, 문장 대신 단말한 신호음이 대화를 대신한다. 세종이 창제한 ‘소리의 과학’은 어느새 ‘무의미의 부호’로 전락하고 있다.

한글은 단순히 편리한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소리의 조형미, 뜻의 구조미, 마음의 윤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언어건축’이다. 자음은 하늘과 사람과 땅의 형상에서 비롯되었고, 모음은 음양의 조화를 본떠 만들어졌다. 이토록 완벽한 문자 체계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집을 허물 듯 마구잡이로 변형하고 있다. “있잖아요”, “졸귀탱”, “감성 터짐” 같은 말들이 SNS를 덮고, 맞춤법이 어긋난 문장은 부끄러움보다 유행이 된다. 언어는 곧 사고의 틀이라 했는데, 말의 질서가 무너질 때 사고의 깊이 또한 함께 얕아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상업과 미디어가 한글을 ‘소비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현실이다. 자극적인 제목과 무분별한 외래어 혼용은 방송과 광고를 점령했다. “핫플”, “인싸템”, “풀옵션 라이프” 같은 어휘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어가 되었고, 젊은 세대는 이를 세련됨의 징표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세련됨이 아니라 문화의 피로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만든 글이, 이제는 사람을 분리하고 세대를 나누는 코드로 변한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글의 본뜻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소통의 도구’를 넘어 ‘공감의 언어’였다. 세종은 지배의 언어가 아닌 나눔의 언어를 원했고, 한글은 그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말로 상처를 내고, 댓글로 증오를 전파하며, 문자를 통해 고독을 키운다. 세종의 언어가 ‘사랑의 기술’이었다면, 우리의 언어는 어느새 ‘소통의 실패학’이 되었다.

세종께 감히 고하나이다.
전하께서 밤잠을 줄이시며 만든 글자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다만 그 생명 위에 우리가 너무 많은 먼지를 쌓았습니다.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이라는 이유로, 진심 대신 약어를 남발하며 언어의 얼굴을 흐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교실에서 또박또박 한글을 읽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 문장의 품격을 지키려 애쓰는 작가들의 손끝 속에, 그리고 ‘말을 고운 마음의 그릇’으로 삼으려는 이들의 노력 속에 한글의 혼은 다시 피어나고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아 우리는 새삼 묻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정보를 전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빚는 일이다.
세종의 정신은 ‘백성의 말속에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면, 한글은 여전히 미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이날, 세종 앞에 마음으로 고개 숙인다.
전하, 죄송하옵니다.
우리가 한글의 집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이 땅의 말과 글을 다시 바로 세워, 전하의 사랑이 머물던 그 언어의 집을 단정히 일으켜 세우리라.
그것이 한글날을 살아 있는 날로 만드는 우리의 진정한 경배일 것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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