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허준의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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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남 주는 사람
― 허준의 마음, 세상의 도리
세상에는 지식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다. 손맛 하나, 기술 하나, 비법 하나를 생명처럼 감춘다. 심지어 신당동 떡볶이 아줌마도 소스의 비법은 끝내 말하지 않는다. “이건 영업비밀이야.” 그 한마디면 모든 대화는 끝난다. 마치 비밀이 곧 생존의 방편이고, 숨김이 곧 성공의 조건인 듯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 그 비법 또한 세상에서 사라진다. 사람들은 ‘그 맛’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전수되지 않은 지식은 결국 시간의 흙 속에 묻혀 버린다.
이런 현실을 보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공부해서 남 주냐?”
누군가의 입버릇처럼, 또 시대의 냉소처럼 들리던 이 말은 사실 우리 사회의 깊은 단면을 비춘다. 내 것이 된 순간, 남에게 주면 손해라는 인식. 남이 알면 경쟁자가 된다는 두려움. 그래서 사람들은 배운 것을 숨기고, 가진 것을 감추며, 지식을 무기처럼 쥐고 산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결국 자신 안에서 썩는다. 나누지 않는 기술은 전통이 되지 못하고, 닫힌 비법은 결국 자기 무덤 속에서 끝난다.
반면, 조선의 명의 허준은 달랐다. 그는 배운 것을 품지 않았다. 그가 쓴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한 사람의 생애를 갈아 만든 인간 사랑의 기록이다. 허준은 아픈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체득한 의술과 경험을 글로 남겼다. 오늘날로 치면 자신의 노하우와 비밀 레시피를 모두 공개한 셈이다. 그는 알았다. 생명을 구하는 의술이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그의 붓끝에는 명예가 아닌 연민이, 부귀가 아닌 자비가 있었다.
허준이 만약 신당동 떡볶이 아줌마였다면 어땠을까?
그는 소스의 비법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매운맛엔 고추뿐 아니라 사람의 눈물이 들어가야 해요.”
아마 이렇게 말하며, 그 비법을 제자에게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맛을 단순한 음식의 맛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잇는 ‘마음의 맛’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지만, 정작 진심은 나누지 않는다. 서로 배우지만 가르치지 않고, 도와달라 하지만 도우려 하지는 않는다. 그 모든 배움이 나만의 경쟁력을 위한 도구로 변했다. 그러나 허준의 삶은 그 반대였다. 그는 ‘공부해서 남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책 한 권이 조선의 의학을 살렸고, 4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생명을 지킨다.
진정한 스승은 지식을 감추지 않는다. 제자가 스승을 넘어설 때 기뻐하는 법이다. 반대로, 자신만 알고 자신만 남기려는 이는 결국 세상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그가 쌓은 비법은 자신의 무덤 속에 묻힐 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단지 의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눔의 철학서’이다. 그는 아픈 이의 몸뿐 아니라, 병든 세상의 마음을 고치려 했다. 그가 써 내려간 글마다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귀한 일은 없다”는 신념이 흐른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기업은 기술을 숨기고, 학문은 논문 속에 갇히며, 사람들은 경험을 공유하기보다 경쟁한다. 하지만 세상은 나눌 때만 발전한다. 불을 감추면 방 하나만 따뜻하지만, 나누면 온 마을이 빛난다.
허준은 그것을 안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르쳤고, 나누었고, 남겼다. 그는 죽어서도 생명을 살렸다. 그가 감춘 것은 비법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이었다. 그는 세상에 말하지 않았다. “내가 쓴 책으로 수많은 이가 살 것이다.” 대신 그는 묵묵히 붓을 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길을 남겼다.
지금 이 시대에도 허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공부해서 남 주는 사람, 배워서 세상을 살리는 사람, 익혀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지식을 감추지 않고, 경험을 나누며, 사랑으로 전수하는 사람.
신당동 떡볶이의 소스가 아무리 맛있어도, 그것은 한 끼의 기쁨이다. 그러나 허준의 동의보감은 세기를 넘어 생명을 살린다. 이것이 바로 ‘비법을 감춘 자’와 ‘비법을 나눈 자’의 차이다.
비밀은 순간을 살리지만, 나눔은 세대를 살린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레시피가 아니라, 허준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병든 관계를 고치고,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진정한 동의보감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