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피카소와 황소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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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전거와 한 뼘의 차이
청람 김왕식
1943년, 스페인 출신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낡고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마주했다. 누구에게나 그것은 그저 녹슨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피카소의 눈은 달랐다. 그는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을 떼어내더니, 그 두 조각을 거꾸로 붙였다. 순간, 폐자전거는 ‘황소의 머리’로 되살아났다. 누군가의 무심 속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예술가의 손끝에서 생명체처럼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작품은 반세기가 지난 후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293억 원이라는 값에 팔렸다. 인간의 상상력이 금속의 부식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변화의 본질은 거창한 기술이나 복잡한 이론이 아니었다. 단지, 한 뼘의 시선 차이였다.
창의성은 언제나 그 한 뼘에서 태어난다.
기존의 시선을 조금만 비껴보는 일,
모두가 버린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
그 단순한 움직임이 세상을 바꾼다.
스티브 잡스도 그랬다. 그는 자주 쓰레기통을 뒤졌다고 한다. 남들이 더럽다며 버린 포장지의 곡선, 낡은 기판의 배선 구조, 찢어진 포스터의 색감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다. 그에게 쓰레기통은 폐기물이 쌓인 통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광산이었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언제나 남들이 외면한 곳에서 보석을 찾았다. 피카소의 자전거와 잡스의 쓰레기통은 시대는 다르지만, 하나의 본질로 이어진다 —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다음에 생긴다.
피카소가 하면 예술이고,
아이들이 하면 장난이 된다.
한 어린아이가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주워와 벽에 걸며 “엄마, 황소 머리 같지?”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어머니는 “그 더러운 걸 왜 주워와! 당장 버려!” 하며 호통칠 것이다. 창의성은 이렇게 가정의 거실에서, 학교의 교실에서, 회사의 회의실에서 조용히 눌려 죽는다. 아이의 눈을 우리는 ‘천진하다’며 칭찬하지만, 막상 그 눈이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불편해한다. 그 불편함이 바로 창의성을 질식시키는 사회의 습성이다.
창의성은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틈에서 자라난다.
문제는 그 ‘틈’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늘 ‘정답’을 가르치고 ‘규정’을 지킨다. 정답이 없는 곳에선 불안해하고, 규정을 벗어나면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짜 창조는 정답이 없는 자리에서만 피어난다. 피카소는 ‘이건 자전거다’라는 상식의 틀을 무너뜨렸고, 잡스는 ‘쓰레기통은 버리는 곳이다’라는 정의를 뒤집었다. 바로 그 한 뼘의 시선 차이가 세상을 다시 썼다.
창의적 사고란 사물을 다시 이름 짓는 용기다.
남들은 “버려진 자전거”라 부를 때, 누군가는 “황소의 얼굴”이라 부르고,
남들은 “쓸모없는 폐품”이라 말할 때, 누군가는 “새로운 질서의 재료”라 여긴다.
예술가 이우환 화백도 그러했다. 그는 하얀 화선지 위에 먹점을 이곳저곳 찍는다. 그 점 하나가 1억 원이다. 그의 ‘점’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시간과 호흡, 존재와 공허가 함께 깃들어 있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아이가 붓을 들고 점을 서너 개 찍으며 “이것도 내 작품이야, 3억이야” 한다면,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 “그건 낙서야.”, “장난치지 마.” 예술과 장난의 차이는 종이 위의 먹점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눈의 깊이에 있다.
예술이란 결국 사물을 다르게 보는 눈, 그 눈이 머무는 태도다. 피카소가 자전거를 통해 황소를 보고, 이우환이 점 하나에서 우주를 보았듯, 창의성은 ‘다름’을 견디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남과 다른 눈으로 보았을 뿐, 그 시선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이다.
우리가 피카소의 자전거를 예술이라 부르고, 아이의 자전거를 쓰레기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권위 때문이다. 예술은 권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깨달음의 순간, 자유로운 감응에서 비롯된다.
창의성은 거창한 발명이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상의 관습을 한 뼘 옮기는 용기다.
그 한 뼘의 거리, 그것이 고철을 예술로, 쓰레기를 혁신으로, 평범한 하루를 영감의 순간으로 바꾼다.
아이의 낙서를 예술로 바라볼 수 있는 눈,
버려진 자전거에서 황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마음,
흰 화선지의 점 하나에서 무한의 울림을 듣는 감각 —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재능이다.
결국 창의성이란 세상을 새로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사랑하는 능력이다.
그 사랑이 깃든 한 뼘의 변화,
그것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다.
어쩌면, 그 한 뼘의 시선이
우리의 삶을 예술로 바꾸는 유일한 힘인지도 모른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