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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 글과 인간의 간극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 했다.
허나 그 거울은 언제나 투명하지 않다. 인간의 마음이 완전하지 않듯, 글 또한 늘 빛과 그림자를 함께 안고 태어난다. 우리는 흔히 글을 인격의 분신이라 믿는다. 과연 글이 인간의 전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인간은 변하고 흔들리지만, 글은 고정되어 남는다. 그 간극에서 문학의 비극과 위대함이 동시에 태어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감추려는 은폐의 기술이다. 작가는 세상 앞에서는 고백자이지만, 언어 속에서는 철저한 조작자다. 글은 보여주기 위해 쓰이지만, 그 보여줌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숨긴다. 진실은 직선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곡선과 여백 속에서, 부재의 언어로 살아 숨 쉰다.

우리는 종종 글과 인격의 일치를 도덕적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 인격이 고결하지 않아도 글이 위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인간이 언어를 빌려 쓰지만, 언어는 인간을 넘어 스스로의 생명을 얻는다. 문학은 바로 그 자율적 언어의 무의식 위에서 춤춘다.

미당 서정주의 시를 생각해 보자. 그의 언어는 국보급이다. 시의 질감, 상징의 밀도, 리듬의 완결성은 한국 현대시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삶에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친일의 흔적, 권력에 대한 헌시, 시대의 타협. 그럼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예술과 윤리의 영역은 맞닿아 있으면서도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다. 인간으로서의 미당은 부끄럽지만, 언어의 미당은 여전히 찬란하다. 문학은 도덕의 잣대로만 잴 수 없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총칼이 앞에 들이대졌을 때, 그 앞에서 목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역사는 언제나 이상보다 생존이 우선되는 냉혹한 현실 속에 있었다. 자발적 친일은 분명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시대의 강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펜을 들어야 했던 이들을 향해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들을 지탄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을 때, 인간의 판단은 겸허해진다.

윤동주와 이육사, 그리고 한용운이 위대한 이유는 단지 그들의 언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들은 글로서 생을 지탱했으며, 글로서 죽음을 받아들였다. 현실의 칼날 앞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고, 글이 곧 존재의 최후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문학은 언어를 넘어 양심의 기록이었다. 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만큼 강하지 못했다. 시대의 폭력 앞에서 인간은 부서질 수밖에 없고, 문학은 그 부서짐의 흔적 속에서 피어난다.

고려의 이규보 또한 그러했다.
그는 시대의 천재였으나, 권력의 회오리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문학의 이상을 노래하면서도, 삶의 현실에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순이 바로 문인의 숙명이다. 현실의 제약 속에서도 언어의 순수를 지키려는 자와, 생존을 위해 글을 굽히는 자는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 그 두 얼굴 사이에서 문학은 피를 흘리며 자란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그것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인간의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이다. 도덕적 불안, 사랑의 결핍, 혹은 시대의 부정 앞에서 침묵할 수 없는 내면의 진실이 글을 낳는다. 인간이 약한 만큼 문학은 강해지고, 인간이 부정한 만큼 글은 정결해진다. 그러므로 글과 인격의 일치는 이상일 수는 있어도, 진실일 수는 없다.

문학은 인간의 허물을 덮기 위한 변명이 아니다. 외려 그 허물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시대의 상처를 비추는 거울이다. 미당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언어의 찬란함 속에 인간의 추락을 본다. 이규보의 글을 읽으며 권력과 타협한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예술의 숨결을 느낀다.
윤동주와 이육사의 시 앞에서,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순결할 수 있는가를 깨닫는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결국 글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쓰인다. 글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그를 구원한다. 그래서 문학은 도덕의 법정이 아니라, 인간의 진실이 머무는 성소다.

우리는 그 앞에서 다시 묻는다. “글이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문학은 답한다.
“인간은 사라져도, 언어는 남는다.”

이것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쓰고, 그 불완전함을 아름답게 견디기 위해 쓴다. 그것이 문학의 숙명이며, 인간이 언어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흔적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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