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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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매 말씀은 흙냄새 같더라
김왕식
아들아, 세상은 말로 사는 게 아녀.
땅 밟고, 흙 만지고, 바람맞으며 사는 거여.
하늘만 쳐다보다가는 발 밑 돌부리에 걸리고,
사람만 쳐다보다가는 제 얼굴 잃는다.
세수는 물로 하는 게 아니라,
밤새 묵은 마음의 먼지를 닦는 거여.
낯 닦고 나면 거울 속에 어제보다 환한 내가 보이지.
그게 새날 맞는 첫 기도여.
밥은 배고파서만 짓는 게 아녀,
사람 사는 향기를 지피는 거여.
불이 세면 밥이 타고,
불이 약하면 밥이 설어.
살이란 것도 그 불조절 같어라.
너무 뜨거우면 남 타고,
너무 차가우면 스스로 얼지.
봄엔 고추 심고, 여름엔 잡초 뽑고,
가을엔 낟알 거두고, 겨울엔 묵은 김치 꺼내지.
철 따라 사는 게 자연이고,
그 자연 따라 사는 게 사람의 길이여.
한철 건너뛰면
그다음 해에 꼭 대가를 치른다.
까치가 지붕에 집을 지으면
그 집엔 웃음이 들고,
참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올 징조란다.
세상 일 다 눈치껏 돌아가니,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흐름을 보거라.
사람도 나무 같어라.
곧은 놈은 울타리로,
휘어진 놈은 의자다리로,
옹이 진 놈은 장독대 받침으로 쓰인다.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다만 제자리를 못 찾은 거지.
아들아,
세상에 잘난 놈, 못난 놈은 없어.
손에 흙 묻혀 일하는 놈이 있어야
깨끗한 옷 입은 놈이 밥을 먹는다.
서로 기대야 둥글게 굴러가는 게 인생이여.
말이 많으면 복이 새고,
웃음이 많으면 복이 들고,
성내는 놈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참아라, 참음이 밭고랑을 만든다.
그 밭에서 네 삶이 여문다.
하늘은 늘 멀리 있고,
사람의 길은 발밑에 있다.
너무 큰 꿈만 좇지 말고
지금 눈앞의 일에 정성을 다 해라.
그게 하늘이 주는 복의 길머리여.
남의 눈물로 이익 보지 마라.
그 물이 돌아서 네 집 처마를 적신다.
네가 한번 웃게 하믄
그 웃음이 먼 훗날 네 자식 품에 돌아온다.
세상은 언제나 돌고 또 돌제.
아들아,
어매는 글을 몰라도 세상을 다 읽었다.
별이 뜰 때면 “오늘도 하루 잘 갔다” 하시고,
해 뜰 때면 “이제 다시 살아야지” 하셨지.
그 소리 들으며 자란 나는
지금도 그 말이 내 등짝을 밀어준다.
살다 보면 눈보라도 치고,
비도 억수같이 퍼붓겠지.
그래도 뿌리 깊은 나무는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단다.
아들아,
하루라도 고운 맘 잃지 말고,
한 끼라도 감사히 먹어라.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여.
어매 말 끝엔 늘 바람이 실려 있었지.
그 바람 속엔
흙냄새 같은 지혜가 스며 있었고,
지혜 속엔
너를 향한 오래된 사랑이 숨 쉬고 있더라.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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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 말씀은 바람 같았지라
김왕식
엄니, 이제야 알겄어요.
세상은 말로 사는 게 아니라
숨 고르고, 땅 밟고, 바람맞으며 사는 거라는 걸요.
어릴 땐 그저 무심히 듣던 말씀들이
이젠 제 가슴 한켠에서 자꾸 되살아납니다.
“세수하는 건 남 보라고 허는 게 아녀.”
그 말, 예전엔 흘려들었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그건 하루 묵은 마음의 먼지를 닦으라는 뜻이었지요.
낯 닦듯이 마음도 닦아야
하루가 새로워진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밥 짓는 불 앞에서
엄니는 늘 조심스러웠지요.
“불이 세면 밥이 타고,
약하면 밥이 설어.”
그 말이 인생이더군요.
너무 뜨겁게 살면 남을 태우고,
너무 식으면 자기 마음이 얼어붙는다는 걸요.
봄이면 고추 모종을 손끝으로 일으키고,
여름이면 잡초 뽑으며 땀을 닦던 모습,
가을이면 낟알 한 톨 허투루 흘리지 않으시고,
겨울이면 묵은 김치 꺼내
된장국에 넣어주시던 손맛—
그 손이 제 세상의 기준이 되었어요.
까치가 지붕에 둥지 틀면
“복이 든다” 하시던 그 웃음,
이제는 그 까치가 제 마음에도 앉아 있습니다.
세상 일에 괜한 건 하나 없다 하셨죠.
말 한마디, 발걸음 하나에도
뜻이 있다는 걸요.
사람도 나무 같다고 하셨지요.
곧은 놈은 울타리,
휘어진 놈은 의자다리,
옹이 진 놈은 장독받침—
그 말씀 덕분에,
부끄러웠던 제 결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엄니,
그때는 몰랐어요.
흙 묻은 손으로 밥상 차리며
“이 세상은 서로 기대야 굴러가는 거여.”
하시던 그 말이
이토록 큰 철학인 줄을요.
남의 눈물 밟지 말라던 말씀도,
이제 제 발등에 돌아와
뜨겁게 새겨졌습니다.
그 한마디가 세상 윤리의 뿌리였다는 걸요.
세상은 메말라 보여도
끝내 공평하다는 걸요.
하늘만 쳐다보다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엄니 얼굴이 떠오릅니다.
“발밑도 봐야 혀,
땅 밟는 놈이 복 받는 거여.”
그 말이 제 평생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엄니,
그때는 그저 촌스럽다 여겼던 말투가
이제는 가장 고운 시가 되어 제 귀에 남습니다.
해 뜰 때마다 새 삶을 주신 그 기도,
별 뜰 때마다 고맙다고 중얼거리던 그 음성—
이제는 제 기도 속에도 스며 있습니다.
살다 보니,
눈보라도 맞고 비바람도 쏟아지지만
엄니 말대로 뿌리 깊은 나무는
한 번도 쓰러지지 않네요.
그 뿌리가 바로 엄니였어요.
엄니,
하루라도 고운 마음 잃지 않으려 합니다.
밥 한 끼에도 감사하려 합니다.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
엄니가 가르쳐주셨잖아요.
이제야 그 뜻을 압니다.
엄니 말씀은 바람이었고,
그 바람은 흙냄새였으며,
그 흙냄새 속엔
아들 향한 오래된 사랑이 숨 쉬고 있었네요.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