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옥 시인의 '달빛 연가(戀歌)'를 읽고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달빛 연가戀歌



시인 박건옥




교교한 달빛 풀잎에 얹혀 있고
연인의 만남은 은밀한 나무 밑

바람은 소슬하여 초목이 떨고
서로의 눈빛이 은은히 감길 때
마음은 파랑 되어 호수를 도네

여운이 날개 되어 사위를 날 때
밤하늘 별똥별 유유히 흐르고
연인의 속삭임은 달빛의 戀歌

시간은 흘러 말은 없어도
은하수 맑은 물 연정에 물드네




절제의 미학, 달빛 아래 피어난 고결한 사랑의 노래
― 박건옥 시인의 '달빛 연가(戀歌)'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건옥 시인의 '달빛 연가'는 사랑의 감정을 감각적 언어로 드러내되, 한 치의 과잉도 없이 정제된 고요 속에 품은 정결한 열정의 시이다.
그의 시 세계는 서정의 흐름을 넘어, 한학적 교양과 동양적 절제미가 어우러진 ‘품격의 시학’으로 완성된다. 이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흔들림보다 중심을 세우려는 한 시인의 도(道)의 정신, 곧 시심의 고결함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시의 첫 행 “교교한 달빛 풀잎에 얹혀 있고”는 이미 그 정갈한 세계를 열어 보인다. 시인은 사랑을 불타는 열정이 아니라 ‘얹혀 있음’의 은유로 표현한다. 교교한 달빛은 세속적 욕망의 불빛이 아니라, 고요한 성찰의 빛이다. 풀잎 위에 내려앉은 달빛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나란히 머무는 ‘존중의 사랑’을 말한다. 시인은 사랑을 덮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사랑은 조용히 내려앉고, 스며들며,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비춘다.

“연인의 만남은 은밀한 나무 밑”이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인간 사랑의 원형적 공간을 불러온다. 나무는 생명의 근원이며, ‘은밀함’은 욕망의 감춤이 아니라 신성한 보호의 장막이다. 이 사랑은 본능적이되 고결하며, 감정이되 절도 있다. 그는 인간의 사랑을 동물적 충동으로 내리지 않고, 달빛처럼 정화된 상태로 끌어올린다.
시인의 내면에는 이미 한학적 교양에서 비롯된 ‘도의 미학’이 흐른다. 욕망은 자제 속에서 빛나고, 정은 절제 속에서 깊어진다.

“바람은 소슬하여 초목이 떨고 / 서로의 눈빛이 은은히 감길 때”는 감정의 교류를 사물의 반응으로 치환한 대목이다. 초목의 떨림은 사랑의 진동이며, 눈빛의 감김은 마음의 포용이다. 시인은 감정의 정점을 고함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은은히’라는 부사처럼, 사랑은 조용히 피어오르며 시 전체에 미세한 울림으로 퍼진다. 이러한 절제된 언어의 미학은 박건옥 시인의 평생 품격 있는 삶의 태도와 닮아 있다.

“마음은 파랑 되어 호수를 도네”에서 사랑은 비로소 내면의 깊이로 번진다. 파랑(波浪)은 격정의 은유이지만, ‘호수’라는 닫힌 공간 안에서 순환하며 소용돌이치지 않는다. 동정(動靜)의 균형이 이루어진 사랑, 곧 절제된 열정이다. 이 절제야말로 한학적 사유에서 길러진 내면의 힘이며, 박건옥 시인의 시세계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정신의 수양으로 승화되는 지점이다.

이어지는 “여운이 날개 되어 사위를 날 때 / 밤하늘 별똥별 유유히 흐르고 / 연인의 속삭임은 달빛의 연가”는 사랑의 서정을 가장 순수하게 그려낸 장면이다. 여운이 날개가 되어 사위를 나는 순간, 시인은 사랑을 현실의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으로 바꾼다. 별똥별은 찰나의 빛이지만, 그 짧음이 외려 영원의 은유가 된다. 사랑은 지속이 아니라 순간의 충만함으로 완성된다. ‘달빛의 연가’는 그 충만의 노래이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감정의 형식이다.

종결부 “시간은 흘러 말은 없어도 / 은하수 맑은 물 연정에 물드네”는 사랑의 철학적 귀결을 암시한다. 시인은 언어의 소멸을 사랑의 완성으로 본다. 언어 이전의 감정, 소리 없는 교감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자리다. 은하수의 맑은 물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정화한 영혼의 물이며, ‘연정에 물드는’ 행위는 그 정화된 사랑이 우주의 질서와 합일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박건옥 시인의 시는 한학의 깊이와 자연의 섬세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난다. 그는 오랜 세월 한시의 운율과 상징을 탐구하며, 절제된 말속에 감정의 진폭을 담아내는 법을 익혔다. 그 삶 역시 시와 다르지 않다. 고결한 품성, 절도 있는 언행,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선비적 삶이 그의 시정신을 이루는 뿌리다.

'달빛 연가'는 그가 평생 닦아온 인격의 결실이며, 시가 인생의 거울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정의 홍수 속에서 정제된 한 잔의 물처럼 맑고 투명하다. 이 시를 읽으면 사랑이 욕망이 아니라 도(道) 임을, 달빛이 그저 빛이 아니라 영혼의 언어임을 깨닫게 된다.

박건옥 시인은 말의 절제 속에서 사랑의 무한함을, 삶의 고요 속에서 존재의 충만함을 노래한다. 그의 시는 오래된 선비정신의 현대적 부활이며, 문명과 소음의 시대에 던지는 한 줄의 맑은 숨결이다.
그의 달빛은 눈부시지 않다. 다만 은은히, 오래도록 인간의 마음을 비춘다.
그것이 박건옥 시인의 품격이자, 시의 고결함이다.

―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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