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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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동선夏爐冬扇
― 쓸모를 잃은 순간, 존재는 본래의 빛을 드러낸다
여름 한낮, 다락 한켠에 밀어둔 화로가 있다.
먼지가 내려앉고, 그 위에 햇살이 고요히 머문다.
누구도 그를 찾지 않는다.
화로는 여전히 불의 기억을 품고 있다.
재 속에는 옛 온기의 숨빛이 남아 있다.
한편, 벽장 속엔 부채가 잠들어 있다.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그의 살결은 쓸모를 잃었다.
부챗살 사이엔 여름 바람의 추억이 숨어 있다.
한때의 쓸모가 사라진 자리에,
시간의 품격이 피어난다.
사람들은 효율을 찬양한다.
지금 당장 쓰이지 않으면,
모두 낡고 버려진 것으로 여긴다.
세상의 리듬은 언제나 순환한다.
여름의 화로가 내일의 온기를 예비하고,
겨울의 부채가 내년의 바람을 기억한다.
쓸모없음은 단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어느 날, 나는 다락에서 그 화로를 꺼내 닦았다.
손끝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 묵은 재 속에서
이상하게도 따뜻한 냄새가 났다.
그건 어머니의 겨울이었다.
추운 새벽마다 화로 위에 감자를 굽던 그 손길,
시간의 잿빛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온기였다.
세상은 유용함으로 존재를 재단하지만,
인간은 그 쓸모의 바깥에서 인간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기억이 된다.
쓸모를 잃은 순간,
그 존재는 비로소 의미가 된다.
겨울 끝자락, 나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부채를 흔드니
그 안에서 여름의 바람결이 스쳤다.
쓸모는 사라졌지만, 계절은 여전히 돌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의 때를 잃고도
서로를 기다리며 이어진다.
□
하로동선—시기를 잃은 물건이지만,
그 안엔 인간의 시간과 계절의 숨결이 있다.
세상은 효율로 굴러가지만,
삶은 쓸모없음에서 아름다워진다.
때를 놓쳐도 괜찮다.
진심은 언제나 제때 도착한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