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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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잊음이 아니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자연스레 두 가지 길 앞에 선다.
하나는 되갚음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놓아줌의 길이다.
되갚음은 순간의 통쾌함을 주지만,
결국 그 상처의 무게를 두 배로 안게 된다.
놓아줌은 처음엔 아프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가벼워진다.
용서란 바로 그 두 번째 길 위에서 배우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를 ‘잊음’으로 착각한다.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건 기억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예전에는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와 원망이 피어올랐다면,
이제는 그 일을 통해 내가 자라났음을 보는 것이다.
용서는 과거를 덮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는 일이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정의와 감정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했는데 왜 내가 용서해야 하지?”
그 물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용서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미움은 돌을 움켜쥔 손과 같다.
놓지 않으면 손이 먼저 상한다.
용서는 그 돌을 내려놓는 용기다.
용서는 감정의 종결이 아니라
이해의 시작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옳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또한 자신의 한계 속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그 인정은 굴복이 아니라 통찰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은 비로소 평화에 닿는다.
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건 반복의 연습이다.
아침엔 괜찮다고 생각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미움이 올라올 때,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조용히 되뇐다.
“그래도 이제는 놓아주자.”
그 되뇜이 쌓여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을 떠올려도
가슴이 덜 아프게 된다.
그게 바로 용서의 순간이다.
용서는 결코 약함이 아니다.
그건 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미움은 쉽지만, 용서는 어렵다.
미움은 본능이지만,
용서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깨어진 마음에서 나온다.
아파 본 사람만이
용서의 길을 안다.
용서는 나 자신에게 주는 자유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내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인다.
그는 내 하루의 감정과 생각을 지배하고,
나는 여전히 그에게 묶여 있다.
용서하는 순간,
그는 내 마음에서 떠나가고,
나는 비로소 나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나를 풀어주는 일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다 미움으로 남으면
세상은 돌처럼 굳어버린다.
용서는 세상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한 사람의 용서가 또 다른 마음을 풀고,
그 마음이 또 다른 이의 상처를 녹인다.
그렇게 세상은 다정함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용서는 완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기도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잊는 날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이제는 미움보다 연민이 먼저 온다면,
그게 진짜 용서다.
용서는 상처 위에 핀 작은 꽃이다.
그 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가장 오래 피어난다.
용서는 잊음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미움이 머물던 자리에 연민이 피어날 때,
그때 비로소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