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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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잊힌 떨림을 되살리는 것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옛 시절 장면이다.
한겨울 명절이면 시골 마당에 가마솥이 걸리고, 장작불이 서걱서걱 타올랐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엄마는 고무 대야에 물을 옮겨 담고
누나, 형, 동생이 차례로 들어가 몸에 묵은 때를 벗겼다.
둥둥 떠오르는 때를 체로 조심스레 건져내면
물은 다시 ‘맑아진 듯한’ 얼굴을 했다.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부어 희석시키면
마치 욕탕물을 새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내는, 여섯 남매가 모두 목욕을 마치면
그 물은 장마철 봇드렁처럼 혼탁해졌다.
엄마는 그 물을 버리지 않았다.
한겨울 내내 마른 흙먼지처럼 하얗게 굳어 있던 막내의 솜잠바를
그 고된 물 위에 올려놓고 발로 밟아 빨았다.
손등이 터져 갈라지는 겨울 물살 속에서도
엄마는 말없이 움직였다.
이제 정말 버릴 때가 되어
앞마당을 향해 물을 기울였을 때,
마지막 한마디가 살포시 따라갔다.
“지렁아, 눈 감아라. 뜨겁다.”
이 한마디에는 세상 모든 시학이 들어 있다.
문학이란 결국 이런 마음이다.
보이지 않는 생명에게조차 먼저 온기를 건네는 마음,
땅속의 작은 미물에게도 뜨거운 물이 닿을까 조심하는 손.
이것이 생태이며, 사랑이며, 시다.
이것이 문학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아주 단순하고도 깊은 이유다.
문학은 화려한 언어의 장식이 아니다.
삶에서 건져 올린 작은 장면 속에 숨어 있는
숨결, 떨림, 배려, 따스한 한마디가 예술의 근육을 만든다.
고무 대야에 담긴 겨울 물처럼 누군가의 삶은 종종 흐릿하고 탁하다.
그 물속에서 사람들의 상처가 조금씩 떠오르고
서로의 아픔이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는다.
바로 그 탁한 물을 버리지 않고
한 번 더 쓸모를 찾아내는 손길,
다시 앞마당 흙먼지를 잠재우는 데 쓰려는 마음이
문학의 본질이다.
문학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귀한 순간’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그 순간은 종종 가장 가난한 자리,
삶의 끝자락 같은 장면에서 피어난다.
겨울, 장작불, 가마솥, 고무 대야,
지렁이를 향한 한마디.
그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빛을 찾아내는 기술,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은 삶을 바꾸지는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눈을 흔들어 깨운다.
탁한 물을 들여다보며 “더러움”이 아니라
“그 물로 무엇을 더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를 묻게 한다.
문학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예술이다.
지금 시대는 ‘떨림’을 잃어가고 있다.
속도에 지쳐 감정이 말라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문학은 잊힌 떨림을 되살린다.
고무 대야에 담긴 뜨끈한 물이
한겨울 마당에 작은 연기를 피우듯,
문학의 한 문장이 사람의 마음에서 미세한 온도를 올린다.
사람들은 희로애락을 말하면서도
실은 ‘희로애락의 떨림’을 잃어버렸다.
분노는 크고, 슬픔은 급하며, 기쁨은 얕고, 두려움은 무색하다.
문학은 이 잃어버린 결을 되찾아준다.
엄마의 한마디처럼,
그 무엇보다 조용하지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말들.
그 떨림이 우리의 감각을 되살리고,
가슴속 오래된 방을 다시 연다.
고무 대야 문학은 ‘물의 온기’다.
불에서 데워졌으나 손길로 식혀지고,
사람의 몸을 데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쓰임을 찾아내는 물처럼
문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적신다.
문학은 그 자체로 ‘사용된 사랑’이다.
누군가가 먼저 지나간 마음의 흔적을
또 다른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며 온기를 얻는 것.
문학이 아니라면 누가 이 빛을 언어로 구해낼 수 있을까.
결국 문학은 단순하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눈길,
미물을 향한 작은 배려,
버려지는 물에도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손길.
그 사소함 속에 깊은 떨림이 있다.
그 떨림이 감동이고, 공감이며, 인간의 본질이다.
말한다.
문학은 떨림이다.
그 떨림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마지막 감각이다.
한마디 속에 담긴 사랑,
한 장면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의 숨결을 건져 올리는 힘.
문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살아난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도
바로 그 떨림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