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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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모두가 시인이다
청람 김왕식
가을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겨울이 문턱을 열면, 세상은 말보다 먼저 시의 결을 드러낸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저녁 바람의 찬 기운, 길게 눕는 빛의 그림자까지도 하나의 운율이 되어 우리를 시 앞에 세운다. 계절의 경계에 서면 일상의 작은 흔들림조차 문장이 되고,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시를 품은 존재가 된다.
이 길목에서는 모두가 시인이 된다. 완성되지 않은 감정일수록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에.
가을 끝의 풍경은 오래된 원고지를 펼쳐놓은 듯하다. 낙엽은 문장의 파편처럼 흩어지고, 바람은 줄 간격을 맞추듯 잔잔히 흔들린다. 낮은 햇살은 묵은 잉크빛으로 마음의 빈칸을 밝혀 오래 잊고 있던 말들을 끌어올린다. 이때 사람은 자연스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마음 깊이 잠들어 있던 한 줄의 진실을 다시 만난다. 가을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시 한 편을 쓰게 한다.
낙엽 스치는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다. 마음의 결을 따라 적히는 부드러운 자음이다. 찬 공기 속 깊어진 호흡은 시가 첫 행을 찾는 순간처럼 느껴지고, 쌓인 낙엽은 지나온 날들을 포개놓은 기억의 문장이다. 강가의 안개는 말로 다 담지 못한 감정의 숨결이다. 이런 풍경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리듬이 생기고, 말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조용한 한 행이 쓰인다.
계절의 길목은 사람을 한층 더 섬세하게 한다. 미뤄두었던 감정은 윤곽을 갖고, 쉽게 꺼내지 못한 마음은 조용한 형태를 얻는다. 오래된 그리움은 공기의 차가움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잊고 지냈던 이름 하나가 문득 피어오른다. 사랑이든 후회든 감사든, 그 어떤 마음도 이 계절을 지나며 자기 언어를 찾는다. 사람은 시처럼 진솔해지고, 시인처럼 투명해진다.
가을과 겨울의 사이, 이 짧은 고비는 완성과 미완의 경계를 품고 있다. 떠난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이 교차하는 사이에서 우리는 자기만의 문장을 쓴다.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가 조용히 드러난다. 시는 특별한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결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쓰는 것임을 이 순간은 다시 일깨운다. 이 길목에서는 누구라도 자연스레 시인이 된다.
겨울의 기척은 차갑지만, 그 차가움이 외려 생각의 선을 맑게 한다. 바람은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어 본질만 남긴다. 바로 그때 사람은 스스로에게 가장 정직한 한 줄을 적는다. 계절의 어름에서 문장은 짧아도 오래 남는다. 오래 눌러두었던 마음이 비로소 제 목소리를 찾기 때문이다.
풍경은 문장을 건네고, 마음은 그 문장을 제 방식으로 다듬는다. 길지 않아도 좋고,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숨결을 담은 한 줄이면 충분하다. 이 계절에 쓰인 문장은 끝내 남아, 한 사람의 겨울을 따뜻이 지탱하는 은은한 등불이 된다.
그 등불은 긴 겨울을 건너, 다시 새 계절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밝혀준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