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의 정신, 다시 깨어나는 《사상계》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복간된 《사상계》





아들이 아버지를 훔쳐보다
― 장준하의 정신, 다시 깨어나는 《사상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새해 벽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장호권 회장은 여의도를 향해 자유로를 달린다. 도시가 아직 잠든 시간, 차창 밖으로 미끄러지는 가로등 불빛은 하나의 리듬처럼 이어지고, 그 길 위에서 짧은 안부 통화가 오간다. 통화는 길지 않았으나, 그 순간 떠오른 것은 현재의 일정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훔쳐보던 시간, 말보다 침묵이 먼저였던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장준하 선생은 부드럽고 온화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설명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말은 적었으나 행동은 분명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이였던 아들은 그를 자주 ‘훔쳐보았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스승, 설교하지 않는 어른의 등을 바라보며 삶의 태도를 배웠다.

그러나 그 온화함은 언제나 그대로 머물지 않았다. 불의 앞에 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바뀌었다.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눈썹이 한일자로 곧게 당겨졌다. 주변 공기가 먼저 긴장했다. 곧 이어질 말을 모두가 예감했다. 그 일침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원칙의 선언이었다. 타협하지 않는 기준, 물러서지 않는 선. 장준하의 분노는 사적인 성질이 아니라 공적인 윤리였다.

그 윤리가 가장 또렷하게 응결된 자리가 바로 사상계였다. 《사상계》는 단순한 잡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지식인의 사상집이자, 시대를 향한 질문장이었다.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고, 다수의 안락함에 기대지 않았다. 장준하는 글로 싸웠고, 문장으로 책임을 졌다. 그의 필력은 날카로웠으나 목적은 분명했다. 자유와 존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이제 그 《사상계》가 다시 돌아온다. 계간지에서 격월간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발행 주기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다시 질문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더욱 뜻깊은 것은 편집진의 구성이다.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지성들이 참여한 편집진은, 《사상계》를 과거의 유물로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언어로 재생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준하를 기념하는 일이 아니라, 장준하를 닮아가는 일이다. 그의 날카로운 정신,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필력, 그리고 불의 앞에서 눈썹을 곧추세우던 그 태도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배우는 일이다. 《사상계》의 복간은 추억의 호출이 아니라 실천의 요청이다.
아들 장호권이 아버지 장준하 선생을 훔쳐보며 배웠던 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니었다. 삶의 순간마다 지켜야 할 기준이었다. 말보다 행동, 침묵 속의 결기, 그리고 불의 앞에서의 단호함. 새해의 자유로를 달리며 떠올린 기억은 그래서 개인적 회상이 아니라 시대적 당부로 남는다. 지금이야말로 장준하의 사상을 다시 읽고, 다시 써야 할 때다. 그의 정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다시, 문장 속에서 깨어난다.


ㅡ청람

□ 장호권 ㅡ장준하 선생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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