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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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이전의 떨림을
감정은 말보다 먼저 몸에 내려앉는다.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채, 그것은 기압처럼 스민다. 피부 아래에서 온도가 한 단계 바뀌고, 호흡의 박자가 어긋난다. 가슴이 미세하게 가라앉고, 어깨가 이유 없이 굳는 순간이 온다. 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침묵이 조금 두꺼워졌을 뿐이다.
이때의 상태는 감정이 아니라 전조다. 이름을 갖기 전의 떨림, 언어의 문턱에서 망설이는 기척이다.
감정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장식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성급함을 거두는 일이다. 슬픔을 즉시 눈물로 번역하지 않고, 기쁨을 곧장 환호로 바꾸지 않는다. 감각이 감정으로 굳어지는 짧은 시간을 기다린다. 마치 안개가 걷히기를 서두르지 않고, 빛이 방향을 찾을 때까지 자리를 비워두는 태도다. 글은 그 빈자리에서 태어난다. 판단은 뒤로 물러서고, 관찰이 앞으로 나온다.
언어 이전의 감각은 이야기보다 閃光에 가깝다. 번쩍였다가 사라지는 빛, 귀에 걸렸다가 흘러가는 소리, 손끝에 남았다가 지워지는 촉감. 이 破片들은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몸에 흔적으로 남는다. 글쓰기는 이 흔적을 쓸어 담는 일이 아니다. 흩어지지 않도록 잠시 그늘을 만드는 일이다.
감정을 정리하기보다, 감각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감각이 감정으로 변하는 순간은 대체로 고요하다. 말이 많아질수록 그 변환은 흐려진다.
정제된 문장은 숨을 낮춘다. 과장된 형용사를 덜고, 감탄의 속도를 늦춘다. 남는 것은 최소한의 움직임, 단어와 단어 사이의 거리다. 그 간격에서 독자의 감각이 깨어난다.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배치가 된다. 말해지지 않은 부분이 더 또렷해진다.
글은 감각을 전시하지 않는다.
감각으로 들어오는 문을 연다.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앞세우지 않고, 감각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놓아둔다. 독자는 그 공간에 들어와 자신의 체온으로 문장을 데운다. 그래서 좋은 문장은 설득하지 않는다. 닫지 않는다.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 반응을 허락한다. 공감은 동의가 아니라 공명共鳴이다. 서로 다른 마음이 같은 진동수로 잠시 흔들리는 일이다.
정제된 미학은 냉정함이 아니다. 그것은 절제로 만들어진 온기다. 울부짖지 않기에 오래 남고, 설명하지 않기에 깊이 스민다. 감정이 미화될 때 독자는 소비자가 된다. 감각이 정제될 때 독자는 참여자가 된다. 글은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함께 발생하는 사건이 된다.
언어는 감정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한다. 그 표시가 정확할수록 문장은 조용해진다. 조용한 문장은 오래 머문다. 마음을 흔들지 않고, 마음이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감각에서 감정으로, 감정에서 언어로 이어지는 느린 항해 끝에서 글은 비로소 제 자리를 얻는다.
하여, 쓰는 일은 과시가 아니라 還元이다. 불필요한 장식을 벗기고, 소음을 가라앉히며, 처음의 떨림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곳에서 문장은 태어난다. 이름을 얻기 전의 감각을 품은 채, 다시 감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글은 그렇게, 말이 되기 전의 세계를 조용히 호출한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