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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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보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내가 다를 때
사람은 거울 앞에 설 때보다 타인의 눈앞에 설 때 더 크게 흔들린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해석한 나이고, 타인의 시선 속의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이기 때문이다. 두 모습이 겹쳐질 때도 있으나, 대개는 어긋난다. 그 어긋남을 처음 자각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을 의심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믿는다.
내가 어떤 의도로 말했고, 어떤 마음으로 행동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이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에는 늘 사정이 있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맥락과 설명되지 않은 동기가 있다. 그러나 남이 바라보는 나는 다르다. 그들에게 나는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남는다. 말의 끝, 침묵의 길이, 행동의 단면만이 남아 판단의 재료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오해는 태어나고, 거리는 생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 역시 완전하지 않고, 남이 바라보는 나 또한 부분적이다. 다만 성숙은 여기서 시작된다. 가장 멋진 나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 모든 원인을 내게서 찾는다. 오해가 생겼을 때,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곧바로 상대의 이해 부족을 말하기보다 내가 남긴 흔적을 먼저 돌아보는 태도. 이 ‘내 탓’의 정신이야말로 자존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자존을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역전이 일어난다. 내가 나를 방어하려 애쓸수록 남의 시선은 거칠어지고, 내가 나를 성찰할수록 남의 평가는 정제된다. 내가 나를 보는 것보다 남이 나를 보는 것이 더 훌륭해지는 순간은,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졌을 때 찾아온다. 타인의 말이 더 정확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의 시선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단정적이고, 때로는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왜곡 속에도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나의 그림자가 섞여 있다. 그래서 성찰은 선택이 아니라 태도가 된다. 나를 향한 말이 아플수록, 그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는 일. 변명으로 덮기보다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시간. 말하지 않음은 회피가 아니라 숙고다.
성숙한 사람은 두 극단을 피한다.
하나는 타인의 시선을 전부 부정하며 자기 확신 속에 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전부 맡겨 버리는 것이다. 전자는 고립으로, 후자는 소진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균형이다. 나의 의도를 소중히 여기되, 결과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나를 이해하되, 나를 면제하지 않는 태도다.
결국 내가 바라보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는 끝내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교정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미화할 때 타인의 시선은 나를 낮추고, 타인의 말이 나를 과도하게 왜곡할 때 나의 성찰은 나를 다시 세운다. 이 왕복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하여, 삶은 늘 질문으로 남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책임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가.
남의 탓으로 나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내 탓으로 나를 키우고 있는가.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만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내가 바라보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는 조금 더 가까워진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