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비친 나, 윤리로 서는 윤동주 '자화상'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제1부 │ 부끄러움의 시작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어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청람시평


우물에 비친 나, 윤리로 서는 자화상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자화상〉은 ‘자기 성찰’이라는 말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시다. 시인은 거울을 들지 않는다. 대신 우물을 찾아간다. 우물은 땅속에 있으나 하늘을 담는다. 낮은 곳에 있으나 가장 높은 것을 비춘다. 윤동주가 즐겨 택한 윤리적 시선이 바로 이 구조다. 위로 올라가 계몽하거나 선포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 자신을 확인한다. 그 확인은 자랑이 아니라 검열에 가깝다.

첫 연에서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라는 문장은 이미 이 작품의 미의식을 확정한다. ‘홀로’는 시대의 고립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는 고독한 결의이기도 하다. ‘가만히’는 과장 없는 태도다. 윤동주의 언어는 늘 절제된 숨으로 자신의 내부를 다룬다. 그래서 우물 속 풍경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정경이다.
“달”은 양심의 맑음이고, “구름”은 흔들리는 마음이며, “파아란 바람”은 시대의 냉기다. “가을”은 성숙이면서 동시에 끝을 향한 계절이다.

윤동주의 서정은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계절을 윤리의 표정으로 바꾼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등장하는 순간, 시는 자연 묘사에서 인간의 심판으로 넘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 사나이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윤동주의 내면은 단일하지 않다. 미워짐과 가엾어짐, 다시 미워짐과 그리워짐이 교차한다. 이 반복은 우유부단이 아니다. 외려 ‘자기에게 관대해지려는 마음’과 ‘자기에게 엄격해지려는 양심’이 서로 양보하지 않는 상태다.
윤동주의 가치철학은 여기서 드러난다. 인간은 선과 악의 결론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돌이켜 보는 과정이라는 믿음이다. 그가 시대 앞에서 스스로를 먼저 심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인을 꾸짖기 전에, 먼저 자신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지점에서 서정주의 〈자화상〉과의 대비가 선명해진다. 서정주에게 자화상은 한 존재의 기원과 원초적 심연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는 자신 안의 어두움과 생의 본능, 토속적 정념을 뚫고 들어가 “나”의 뿌리를 신화처럼 제시한다. 자아를 발굴하고 확장하는 시선이다.
반면 윤동주는 자아를 확장하지 않는다. 외려 축소한다. 우물가에 선 한 사람으로 줄이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미움과 연민 사이에서 자신을 단정하지 않는다.
윤동주의 자화상은 신화가 아니라 윤리다. 서정주가 생의 원형질을 긍정의 에너지로 끌어올린다면, 윤동주는 생의 떨림을 양심의 떨림으로 바꿔 놓는다.

두 시인은 모두 ‘나’를 보지만, 서정주는 존재의 비밀을 향해 들어가고, 윤동주는 존재의 책임을 향해 내려간다.
서정주의 자화상이 강렬한 생의 자서전이라면, 윤동주의 자화상은 낮은 목소리로 쓰인 양심의 진술서다.
하여, 윤동주의 결말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다. 그 자신을 미워도 하고 가엾어도 하며 결국 그리워하는 마음이, 윤동주 서정의 핵이다. 미워함은 자기비판이고, 가엾어함은 인간 이해이며, 그리움은 끝내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마지막 반복구는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로 미세하게 변주變奏된다. 윤동주는 자기를 현재의 법정에서만 세우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 전체를 우물 속에 넣어 둔다.
그리하여 자화상은 ‘한 순간의 초상’이 아니라, 시대와 기억과 양심이 함께 만든 윤리적 풍경화가 된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자신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대신 정직하게 남긴다.
그 정직함이야말로 그의 작품 미의식이며, 그가 끝내 지키려 한 삶의 가치다.
우물 속 달빛은 시인의 장식이 아니라, 시인이 끝내 잃지 않으려 한 단 하나의 양심이다.



■ 달삼과 오산학교 문예교사 청람과의 대화
ㅡ “왜 그는 끝내 자신을 설명하지 않았을까”


보광동 다섯메 교정
고즈넉한 언덕 위,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초가을 저녁,
바람은 서늘했지만 성급하지 않았다.

달삼이 읽고 있던 시집을 덮었다.
“선생님,
이 시는 이상해요.”

청람이 웃지 않고 물었다.
“어떤 점이.”

“읽고 나면
뭔가 정리된 느낌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남아요.
미워했다가, 가엾어했다가,
그리워했는데도
아무 결론이 없어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윤동주가 의도한 자리다.”

“보통 자화상이면
자기를 이해하거나,
조금은 화해하지 않나요?”

“윤동주는
자기와 화해하는 일을
가장 마지막으로 미뤘다.”

달삼은 우물 속 사나이를 떠올렸다.
“사나이는 계속 그대로 있잖아요.
미워해도, 불쌍해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청람이 말했다.
“윤동주는
성찰이 곧 변화로 이어진다는
쉬운 믿음을 거부했다.”

“그럼 왜 다시 우물로 돌아갔을까요?”

“확인하려고.”

청람이 짧게 말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달삼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선생님,
이건 너무 자기한테 가혹한 태도 아닌가요?”

청람이 고개를 저었다.
“가혹한 게 아니라,
정직한 거다.”

잠시 바람이 불었다.

달삼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근데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해 봐라.”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보고
자꾸 다른 시가 떠올랐어요.”

청람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누구지.”

“서정주 시인이요.”

청람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
드디어 거기까지 왔구나.”

달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서정주의 〈자화상〉에서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 바람을
그냥 자연으로 보면
너무 순한 해석 같아요.”

청람의 눈빛이 깊어졌다.
“계속.”

“그 바람은
서정주가 살아오면서 겪은
궁핍, 폭력, 시련 같은
거친 역경 아닐까요?
삶의 대부분이 바람이었다는 뜻.”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서정주의 바람은
산들바람이 아니다.
통과해야 했던 세계다.”

달삼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서정주는
그 바람을 견뎌낸 자신을
하나의 완성된 얼굴로 내놓은 거잖아요.”

“그렇다.”

“근데 윤동주는
그런 말을 안 하네요.”

청람이 말했다.
“윤동주는
자기 삶을
통과의 서사로 만들지 않았다.”

“왜요?”

“시련을 말하는 순간,
그 시련이
자기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달삼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이만큼 아팠으니 괜찮다’
이 말을 끝내 하지 않은 거군요.”

“그래.”

청람은 우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정주는
바람을 통과한 자의 얼굴이고,
윤동주는
아직 통과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의 응시다.”

달삼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가
더 불편한가 봐요.”

“그렇다.
윤동주는 독자에게도 묻는다.
‘너는 정말 통과했느냐’고.”

잠시 침묵이 흐른다.

달삼이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이제 알 것 같아요.
윤동주는 자기를 미워한 게 아니라
자기를 서둘러 설명하지 않은 사람이네요.”

청람이 미소 지었다.
“그래.
윤동주는
자기 삶을 이야기로 완성하지 않는
윤리를 선택한 시인이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우물 속 달빛이 흔들렸다.

달삼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서정주의 바람은
삶을 증명하는 힘이었고,
윤동주의 우물은
삶을 증명하지 않으려는 거리였네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양심의 자리에 서 있다.”


*
윤동주(尹東柱, 1917.12.30 ~ 1945.2.16)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2000년 12월 24일)


ㅡ청람


□ 윤동주(尹東柱, 1917.12.30 ~ 1945.2.16)



□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2000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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