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화분에서 피어난 온기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버려진 화분에서 피어난 온기


청람 김왕식




겨울은 늘 공평한 듯 보이나, 사실은 가장 약한 것부터 먼저 시험한다.
바람은 골목의 모서리를 꺾어 다니며 살갗을 베고, 사람들 마음마저 얼게 만든다.
그런 날이면 세상은 자꾸만 “버려도 된다”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낡은 것, 오래된 것,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로 밀어 넣고 잊어버리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겨울 한복판에서도, 어떤 생명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으려는 의지가, 아주 작은 촉으로 세상을 다시 밀어 올린다.


쓰레기 더미 속에 버려진 화분 하나가 있었다.
흙은 마른 숨을 토해냈고, 깨진 가장자리는 세월의 금이 간 얼굴 같았다.
사람들이 지나치며 외면하던 그 화분 속에서, 난초의 촉이 조심스레 올라왔다.
살아 있다는 말은 늘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시작한다.
큰 깃발이 아니라, 작은 떨림으로.
마치 밤새 얼어붙은 창문 틈에서 새벽빛이 한 줄 먼저 스며드는 것처럼.


그 촉을 발견한 이는 폐휴지를 줍는 노인이었다.
그의 손은 겨울을 오래 만져 온 손이었다.
거칠고 갈라진 손바닥은, 세상이 얼마나 차가운지 말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노인은 화분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연민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아직 살아 있구나.’
그 말 한마디가 삶을 살리는 첫 불씨가 될 때가 있다.
노인은 비닐을 여러 겹 둘러 난초를 감쌌다.
바람이 직접 닿지 않게, 냉기가 숨구멍으로 스며들지 않게.
비닐은 화려한 보호막이 아니었다.
그저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이불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람이 멎는 장독대 곁으로 화분을 옮겼다.
장독대는 오래된 집의 숨이 모이는 자리다.
김치와 된장이 익어 가듯, 기다림과 인내가 쌓이는 자리다.
그곳에 난초를 두는 것은,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건네는 일이었다.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보살핀다.
세상은 그렇게 나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로 이어져 있다.
버려짐과 돌봄 사이에는 늘 사람이 있다.
사람이 어떤 눈을 가졌는지, 어떤 손을 가졌는지가 그 경계를 만든다.
노인의 손이 난초를 바람에서 숨겨 주는 순간, 겨울은 잠시 방향을 잃는다.
혹한이 지배하던 골목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온기가 한 겹 더해진다.


그 장면을 본 초등학생이 있었다.
아이의 눈에는 그 촉이 유난히 또렷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작은 것을 잘 본다.
어른들이 지나치는 미세한 떨림을, 아이들은 크게 느낀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해, 그 난초를 집에서 키우겠다고 했다.
이 말에는 거창한 구원이 없다.
다만 “내가 품겠다”는 단순한 결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대개 그런 결심이다.
한 생명을 ‘밖’에서 ‘안’으로 옮기는 일.
추위 밖에서 온기 안으로, 버려짐에서 돌봄으로, 무심함에서 책임으로.


난초는 꽃이 피기까지 오래 걸린다.
서두르는 법이 없고, 소란스러운 법도 없다.
때를 지키며, 자신이 가진 향을 끝까지 아끼는 식물이다.
그래서 난초의 촉은 단순한 새순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겠다”는 세계의 조용한 대답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한 번 더 봄을 준비하겠다는 결심이다.


그날의 겨울은 여전히 매서웠을 것이다.
노인의 삶도, 아이의 집안도, 세상의 냉기도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난초가 비닐 속에서 숨을 이어 가듯,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살아난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순간, 얼어붙은 삶에도 작은 공기가 통한다.
온기는 난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온기는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먼저 시작한다.


버려진 화분 속 촉 하나가 알려 준다.
세상이 아무리 차가워도, 생명은 끝내 사람을 기다린다고.
그리고 사람 또한, 어느 순간 누군가의 촉이 되어
다른 생명의 겨울을 견디게 해 줄 수 있다고.
오늘도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보살핀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남기는 결론은 하나다.
겨울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은, 크고 뜨거운 불이 아니라
작은 생명을 품어 주는 마음의 온기라는 것.


ㅡ청람






작가의 이전글안쪽의 방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