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8편 십자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문학평론가]
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8편







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 윤동주의 〈십자가〉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십자가〉는 신앙 고백의 시가 아니라, 고통을 품은 인간이 끝내 도달하고 싶은 한 자리를 바라보는 시다. 이 시에서 십자가는 교리의 상징이기 전에, 한 사람이 자기 양심을 끝까지 지키려 할 때 맞닥뜨리는 “최후의 언덕”이다. 윤동주는 십자가를 찬미하지 않는다. 외려 멀리서 바라본다.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높이, 오르고 싶지만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로 그린다. 그 거리감이야말로 윤동주의 신앙이 가진 진실성이다.
그는 신을 쉽게 소유하지 않고, 구원을 쉽게 발음하지 않는다. 믿음 앞에서도 그는 늘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욱 깊다.
시의 첫 두 줄은 놀랍도록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롭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햇빛이 ‘쫓아오던’ 존재였다는 진술은, 삶이 한때는 희망으로 움직였음을 암시한다. 햇빛은 따뜻한 구원처럼 따라오고, 시인은 그 빛을 향해 걸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햇빛이 “십자가에 걸려” 있다. 빛이 빛으로 남지 못하고, 형벌의 표지처럼 매달려 있다. 윤동주는 여기서 희망의 형태가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을 보여 준다. 빛은 위로일 수 있으나, 시대가 어두우면 그 빛조차 십자가의 그늘로 들어간다. 윤동주가 바라본 구원은 쉬운 기쁨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한 빛이다.

이어지는 물음은 소박하지만 절망의 깊이를 가진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공간의 높이를 말하지만, 실은 존재의 높이를 말한다. 윤동주에게 첨탑은 신에게 닿는 길이자, 자기 내면의 순결에 닿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높다. 높다는 것은 곧 외롭다는 뜻이다. 누구나 올려다볼 수 있으나, 아무나 오를 수는 없는 자리. 그래서 그는 탄식한다. 이 시의 감동은 질문에서 나온다. ‘왜 이렇게 높으냐’고 따지지 않고, ‘내가 어떻게 오르느냐’고 묻는 태도. 윤동주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윤리의 엄격함이 여기서 드러난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이 대목은 윤동주의 인간적인 떨림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종소리가 없다는 것은, 하늘의 응답이 없다는 뜻이다. 기도해도 대답이 오지 않는 밤. 그럼에도 그는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다만 “서성거린다.” 윤동주의 신앙은 확신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응답 없는 침묵 앞에서 버티는 시간이 그의 신앙을 만든다. 휘파람은 가벼운 행동처럼 보이나, 사실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작은 버팀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입술에 바람을 불어넣는 행위. 윤동주의 시에서 이런 작은 동작 하나가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중심부에서 윤동주는 가장 위험한 문장을 꺼낸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여기서 윤동주는 예수를 ‘행복한’ 존재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면 낯설다. 십자가의 예수를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윤동주에게 행복은 편안함이 아니다. 자기 길을 끝까지 알고 가는 평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고요, 자기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확신,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므로 “괴로웠던 사나이”인 자신도, 만일 예수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허락’이 중요하다. 그는 스스로 십자가를 만들지 않는다. 고난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시대가, 운명이, 하나님이 그 길을 허락한다면—그때는 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절제된 결심이 윤동주를 고귀하게 만든다.

마지막 연은 윤동주의 서늘한 아름다움이 정점에 이르는 부분이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죽음을 비명으로 쓰지 않는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라는 표현은 잔혹한 장면을 미화하려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윤동주의 미의식은 고통마저도 절망의 색으로만 남기지 않으려는 마지막 품위를 품는다. 피는 붉고, 붉음은 생명의 색이며, 꽃은 생명의 형상이다.
윤동주는 죽음의 순간에도 생명의 형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라고 말한다. 조용함은 윤동주의 태도다. 그는 세상을 향해 큰소리로 영웅을 자처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가장 큰 결심을 세운다. 어두워가는 하늘은 시대의 검은 현실이지만, 그 아래에서 그는 피를 흘리며도 인간의 품위를 버리지 않는다.

이 시의 감동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리”에서 온다. 윤동주는 이미 십자가 위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첨탑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이다. 응답 없는 종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올라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올려다본다. 바로 그 태도 때문에 윤동주의 십자가는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양심이 된다.

결국 〈십자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빛은 더 높은 곳에 걸리고, 인간은 그 빛을 향해 서성거리며 길을 배운다. 그리고 언젠가 고난이 허락될 때, 그는 울부짖지 않고 “조용히” 자기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 자기 길을 증명하겠다. 윤동주의 신앙은 눈물로 웅장해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단단해진다.
하여, 이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기보다, 오히려 더 고요해진다. 고요해진다는 것은, 윤동주의 세계에 잠시 닿았다는 뜻이다.




■ 달삼과 오산학교 문예교사 청람의 대화



문예반실 앞 복도는 유난히 길었다.
겨울로 넘어가는 바람이 창틀 사이로 새어 들어와, 형광등 불빛까지 조금 차갑게 만들었다. 청소 시간이 끝난 뒤라 바닥은 젖은 걸레 냄새가 희미했고, 멀리 음악실 쪽에서 피아노 소리가 한 번 튕기다 끊겼다. 학교는 늘 이렇게—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시작되려다 멈추는 소리로 가득했다.
문예반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달삼이 들어왔다.
교복 칼라가 빳빳했고, 목은 어딘가 굳어 있었다. 따뜻하게 들어온 얼굴이 아니라,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들어온 얼굴이었다. 손에는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그 종이는 일부러 구겨지지 않게 접혀 있었고, 손끝은 그 접힌 선을 계속 만지고 있었다.

청람은 책상 위에 놓인 시집을 덮지 않았다. 덮어두면 달삼이 말문을 닫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람은 달삼이 먼저 꺼내길 기다렸다.
달삼이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이상하게 햇빛이 십자가에 걸려 있는 장면이 떠나질 않습니다.”

청람은 고개를 들었다. 달삼이 건네는 제목을 굳이 묻지 않았다. 이미 알 수 있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한 번 읽으면 문장보다 장면이 남는 시였으니까.
달삼이 종이를 펼치고 읽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달삼은 ‘걸리었습니다’에서 잠깐 숨이 멎었다. 걸린다는 말은 가벼운 동사가 아니다. 무언가가 멈춰 있고, 매달려 있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다. 빛이 걸렸다는 말은, 희망이 갇혔다는 말처럼 들렸다.
달삼이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햇빛이 왜 ‘쫓아오던’ 겁니까?”
“햇빛은 가만히 비추는 건데, 윤동주는 왜 햇빛이 따라오는 것처럼 말합니까?”

청람은 단정하게 말했다.

“윤동주는 빛을 풍경으로 보지 않는다.”
“자기한테 오는 존재로 본다.”

달삼이 되물었다.

“그럼 그 햇빛은… 위로였나요?”

청람은 고개를 끄덕이되, 그 위로를 쉽게 인정하지는 않았다.

“위로이기도 하고, 부름이기도 했다.”

청람이 덧붙였다.

“빛이 쫓아오는 건, 그냥 따뜻해서가 아니다.
‘너는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뒤에서 밀기 때문이다.”

달삼은 그 말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위로보다 부름이 더 무거운 법이니까.
그는 다음 연을 읽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달삼은 여기서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올라갈 수 있을까요”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포기의 문턱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달삼이 말했다.

“선생님, 십자가가 너무 멉니다.”
“윤동주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왜 이렇게 멀게 말합니까?”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더 솔직하게 덧붙였다.

“믿으면 가까워지는 거 아닌가요?”

청람은 잠시 창밖을 봤다.
운동장 끝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밝았지만 멀었다. 가까이 가려면 어둠을 지나야 했다.

“달삼아.”

청람이 말했다.

“믿음이 가까움을 만드는 게 아니다.”
“믿음은… 거리를 견디게 한다.”

달삼이 눈을 크게 떴다.

“거리를요?”

청람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윤동주는 십자가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않는다.”
“손에 넣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진짜다.”

달삼은 그 말이 이해되면서도 마음이 더 서늘해졌다. ‘가까운 신앙’이 아니라 ‘먼 신앙’이 윤동주를 만든다는 사실이.
달삼은 다음 구절을 읽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달삼은 ‘휘파람’에서 잠깐 웃었다.
웃긴 게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라서 웃음이 나는 순간이 있다. 윤동주는 그렇게 훅 들어온다.
달삼이 말했다.

“선생님, 휘파람은 너무… 가볍지 않습니까?”
“이 시는 십자가를 말하는데, 휘파람이라니요.”

청람은 그 질문에서 이 시의 진짜 무게를 꺼내 보였다.

“가벼워서 휘파람을 부는 게 아니다.”
청람이 말했다.
“무거워서 부는 거다.”

달삼이 묻지 않아도 청람은 이어갔다.

“종소리가 안 들리는 건 응답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응답이 없을 때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한다.”
“완전히 무너지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을 한다.”

달삼이 조용히 말했다.

“윤동주는 농담을… 하는 거군요.”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 아니라 버팀이다.”
“휘파람은 그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만든 작은 울타리다.”
“사람은 너무 고요하면 스스로의 어둠에 삼켜진다.”
“그래서 윤동주는 일부러 바람을 입술로 불어낸다.”

청람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시가 아니라 생존이다.”

달삼의 눈빛이 달라졌다. 휘파람 하나가 이렇게 잔인한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달삼은 시의 핵심으로 갔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달삼은 여기서 ‘행복한’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거의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이건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행복하다고요?”
“십자가에서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청람은 바로 여기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지나치는 지점을 붙잡았다.
윤동주의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상태라는 것.

“윤동주가 말하는 행복은 편안함이 아니다.”

청람이 말했다.

“자기 길을 아는 사람의 고요다.”

달삼이 되물었다.

“그게 행복입니까?”

청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괴로움은 상황이고, 행복은 중심이다.”
“윤동주는 예수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괴로워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다.”

달삼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교복 안에서 심장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위로가 아니라, 기준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달삼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윤동주는 십자가를 원합니까?”
“왜 ‘허락된다면’이라고 말합니까?”
“이건 너무 위험한 소망 아닙니까?”

청람은 여기서 선을 분명히 그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고난 찬양’이 아니라 ‘각오’라는 것.

“윤동주는 고난을 사랑하지 않는다.”
청람이 말했다.
“그는 고난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피할 수 없을 때 도망치지 않을 준비를 하는 거다.”

달삼이 중얼거렸다.

“준비…”

청람은 이어 말했다.

“그게 ‘허락된다면’이다.”
“내가 스스로 만들지 않겠다.”
“내가 과장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게 오면… 외면하지 않겠다.”

청람은 마지막을 짧게 끊었다.

“그게 윤동주의 품격이다.”

달삼은 마지막 연을 읽었다.
여기서 달삼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이 됐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달삼은 ‘꽃처럼’에서 숨이 멈췄다.
피는 피인데, 왜 꽃이라고 했는지. 그게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너무 처절해서.
달삼이 물었다.

“선생님, 피가 어떻게 꽃처럼 피어납니까…”
“이건 너무 슬픕니다.”

청람은 단순한 감상으로 넘기지 않았다.
윤동주의 미학은 ‘예쁘게 꾸미는 미학’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남기는 미학’이기 때문이다.

“꽃은 ‘죽음’이 아니라 ‘생’의 모양이다.”

청람이 말했다.

“윤동주는 죽음의 순간에도 생의 모양을 남기고 싶었던 거다.”

잠깐 멈추고 덧붙였다.

“자기가 쓰러져도, 자기 피가 증오로만 남지 않게.”

달삼이 조용히 되물었다.

“증오로 남지 않게…”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조용히’다.”

청람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윤동주는 큰소리로 순교하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자기 양심을 증명한다.”

달삼은 종이를 접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접는 선은 반듯했다. 떨리는 사람도 반듯해질 수 있다는 걸 이 시가 가르치고 있었다.
달삼이 한 번 더 말했다.

“선생님, 윤동주는 왜 이렇게까지 조용합니까?”
“왜 울부짖지 않습니까?”

청람은 달삼을 바라보며, 마치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한 문장을 꺼냈다.

“달삼아.”
“윤동주는 울부짖으면 자기 마음이 무너질까 봐 조용한 게 아니다.”
“그는 조용해야… 하늘이 들린다고 믿은 사람이다.”

문예반실 밖 복도에서 누군가 뛰어가는 소리가 났다.
교실 안의 두 사람은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소음도 방금 읽은 조용함을 깨지 못했다.
달삼이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십자가는 결국 뭡니까?”

청람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윤동주의 문장처럼, 짧고 깊게 말했다.

“빛이 가장 높이 걸리는 자리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낮아지는 자리다.”
“그 둘이 만나는 곳이 십자가다.”

달삼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교복 뒷모습이 잠깐 보였다.
문예반실에는 윤동주의 문장만 남았다.
햇빛이 십자가에 걸려 있는 장면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밤이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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