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9편 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문학평론가]
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9편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둘과 둘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 9, 31





■ 윤동주의 〈길〉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길〉은 길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림을 견디는 인간의 태도를 길이라는 형태로 보여 준 시다. 이 작품에서 길은 목적지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형상이다. 윤동주는 길 위에서 어떤 성취를 말하지 않는다. 길의 끝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잃어버린 것을 모른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더듬는 한 사람의 초라한 자세를 먼저 꺼내 놓는다. 그 초라함이야말로 이 시의 첫 진실이다. 윤동주의 시는 늘 큰 구호보다 작은 몸짓에서 시작한다. 작은 몸짓 속에 시대의 무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렸습니다.”

이 첫 문장은 너무 단정해서 오히려 두렵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내 삶에서 빠져나갔다는 뜻인데, 윤동주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라는 고백은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존재의 혼란이다. 시대가 흔들릴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잃는다. 방향을 잃고, 기준을 잃고, 자기 자신을 잃는다. 윤동주는 그 상실을 포장하지 않고 “몰라”라고 말한다.
이 솔직함이 윤동주를 위대하게 만든다. 그는 자기의 어지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 어지러움을 스스로의 언어로 붙들어 둔다.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 길에 나아갑니다.”

여기서 ‘더듬는다’는 말은 이 시를 관통하는 핵심 동작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달리지 않는다. 뛰지도 않는다. 그는 더듬는다. 더듬는다는 것은 밝은 낮의 행동이 아니라 어둠의 행동이다. 확신이 없을 때, 손은 먼저 움직인다. 윤동주는 머리로 길을 찾지 않는다. 몸으로 길을 찾는다. 두 손이 주머니 속을 더듬는 장면에는 쓸쓸한 자기 점검이 있다.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으니, 내가 가진 것부터 확인하는 것이다. 이 더듬음은 가난한 몸짓이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생존의 몸짓이다. 윤동주의 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절망이 아니라, 확인의 습관에서.

두 번째 연의
“둘과 둘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는 놀라운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둘과 둘과 돌’이라는 표현은 숫자의 반복 같지만, 실은 좁고 단단한 세계의 반복이다. 길이 돌담을 끼고 간다는 것은 길이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길이 스스로 방향을 선택하지 못하는 삶. 길은 담을 끼고 가며 담의 규율을 따른다.
윤동주는 여기에 시대의 질감을 넣는다. 억압, 통제, 침묵. 돌담은 단지 공간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가로막는 벽이다. 그 벽은 부드럽지 않고, 차갑고, 단단하다. 이 길은 꽃길이 아니다. 풀 한 포기 없는 길이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에서 시는 더 어두워진다. 쇠문은 열리지 않는 세계의 상징이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문, 아무리 바라봐도 통과할 수 없는 경계. 그리고 그 경계가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그림자는 단지 해가 져서 생긴 것이 아니다. 길 위에 늘 드리워진 시대의 그림자다. 윤동주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단순히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그림자 아래를 통과하는 일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윤동주는 이 어둠 속에서 시의 방향을 한 번 비틀어 놓는다.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여기서 길은 한 방향이 아니다. 길은 순환한다. 아침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다시 아침이 되는 반복. 이는 희망의 반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탈출하지 못하는 반복이기도 하다. 윤동주에게 삶은 직선의 발전이 아니라 순환하는 고독이다. 그러나 그는 그 순환을 절망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길은 결국 통한다고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진다. 이 ‘통한다’는 표현 속에는 끝내 끊어지지 않는 생의 끈질김이 숨겨져 있다.

가장 아름답고도 쓰라린 대목은 여기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윤동주는 다시 ‘더듬는다’로 돌아온다. 돌담을 더듬는 것은 곧 벽을 확인하는 일이다. 길이 막혀 있음을 손끝으로 확인하는 일. 그때 눈물이 난다. 그런데 고개를 들면 하늘이 푸르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다. 문제는 그 푸름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하늘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내가 부끄러운 것이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자책이 아니라 윤리다. 그는 자신이 하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감각을 끝내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한 줄의 푸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거울이다. 하늘이 푸른데 나는 울고 있다. 그 대비 속에서 윤동주의 시는 빛난다. 울면서도 하늘을 본다는 것, 그것이 그가 끝내 놓지 않는 인간의 품격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여기서 윤동주는 길을 걷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무엇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담 저쪽에 ‘나’가 남아 있기 때문에 걷는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금의 나는 완전하지 않다. 나의 일부는 담 저쪽에 남아 있다. 잃어버린 것은 물건이 아니라 ‘나 자신’ 일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찾는 것은 과거의 순수, 잃어버린 기준, 혹은 내가 되었어야 할 어떤 모습이다. 그래서 길은 고행이 아니라 회복의 움직임이 된다. 그는 자신을 되찾으려 걷는다.

마지막 연은 이 시를 존재론으로 끌어올린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는 삶을 거창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성공도, 행복도, 명예도 아니다. 그의 삶은 ‘찾기’다. 잃었으나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찾는 일. 그래서 인생은 늘 불완전하고, 늘 더듬거리며, 늘 길 위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비관이 아니다. 찾는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삶은 상실의 삶이면서 동시에 탐색의 삶이다. 이 시가 감동적인 것은, 그 탐색이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두 손의 더듬음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겸허한 자세가 독자의 마음을 오래 붙든다.

결국 〈길〉은 말한다. 인생은 완성된 자의 행진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의 걸음이다. 벽을 더듬고 울다가도, 하늘의 푸름 앞에서 다시 부끄러워지는 인간의 걸음이다. 윤동주는 그 걸음을 부끄러움으로 단단히 붙들어 두었고, 그 부끄러움이 있었기에 그는 끝내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길을 걷는 사람의 자세가 남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도 끝내 길 위로 나아가는 사람. 그 사람의 등 뒤에서, 하늘은 여전히 부끄럽게 푸르다.




■ 달삼과 오산학교 문예교사 청람의 대화




문예반실은 늘 늦게 어두워지는 방이었다.
밖은 이미 저녁인데, 이 방은 아직 낮처럼 밝았다. 형광등이 환해서가 아니라, 종이 위에 놓인 문장들이 스스로 빛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는 교지 원고지가 몇 장 흩어져 있었고, 창문엔 먼지 낀 겨울빛이 얇게 붙어 있었다. 누군가 창틀을 스치며 지나가자 유리창이 가볍게 떨렸다. 학교의 저녁은 이렇게 작은 떨림으로 시작된다.

청람은 칠판 앞이 아니라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보다, 문장을 기다리는 자리에 더 가까운 사람처럼. 그는 시집을 펼쳐 둔 채로,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다 말고 있었다. 마치 “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더 필요하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달삼이 들어왔다. 교복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넣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데 그렇게 서 있었다. 두 손이 따뜻해지려고 넣은 게 아니라, 뭔가를 찾고 있는 사람의 몸짓처럼 보였다. 가방을 내려놓지 않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결국 청람 쪽으로 걸어왔다.
달삼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윤동주의 〈길〉.
종이는 얇았는데 달삼의 눈빛은 무거웠다.

“선생님.”

달삼이 말했다.

“이 시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잠깐 말을 고르고, 솔직하게 덧붙였다.

“아무것도 없어서 더 무섭습니다.”

청람은 종이를 받지 않고 먼저 물었다.

“뭐가 없다고 느꼈냐.”

달삼은 첫 줄을 읽었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한 번 더 읽었다.
마치 그 한 줄이 문예반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것처럼.

“선생님, 잃어버렸다고만 말합니다.”

달삼이 말했다.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고, 어디다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주머니 속 손을 더 깊게 넣었다.

“그런데… 이게 너무 현실 같습니다.”

청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자주 그렇다.”

청람의 목소리는 얇고 단단했다.

“사람은 정확히 뭘 잃었는지 알 때보다,
뭘 잃었는지도 모른 채 흔들릴 때가 더 많다.”

달삼이 바로 물었다.

“그럼 윤동주가 잃은 건 뭡니까?”
“나라입니까? 자유입니까? 신앙입니까?”

달삼의 질문이 점점 급해졌다.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까?”

청람은 그 질문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잠깐 눈을 내렸다가 올렸다.

“정답을 하나로 만들지 마라.”
“윤동주는 ‘잃었다’는 상태 자체를 쓰고 있다.”

청람이 말했다.

“나라를 잃었을 수도 있고,
친구를 잃었을 수도 있고,
자기 안의 평안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을 한 번 더 눌렀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가장 큰 상실은 ‘기준’이다.”

달삼의 눈이 흔들렸다.

“기준이요?”

청람은 짧게 말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나인지.”
“그게 흔들리면 사람은 무얼 잃었는지도 모른다.”

달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복 주머니 속 손이 그제야 조금 느슨해졌다.
달삼이 다시 읽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달삼은 ‘더듬어’에서 멈췄다.
그 단어 하나가 손끝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선생님.”

달삼이 말했다.

“왜 윤동주는 ‘생각해 봅니다’가 아니라
‘더듬어’라고 합니까?”

그는 어깨를 한 번 움찔했다.

“더듬는 건… 어둠 속에서나 하는 거잖아요.”

청람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맞다. 어둠 속에서 하는 행동이다.”

청람은 말끝을 짧게 끊었다.

“그러니까 이 시의 길은 낮길이 아니다.”

달삼이 묻지 않아도 청람은 이어갔다.

“머리로 찾을 수 있는 건 길이 아니다.”
“머리로 찾을 수 있으면 이미 안 잃어버린 거다.”

청람은 손가락으로 달삼의 주머니를 가볍게 가리켰다.

“윤동주는 주머니를 더듬는다.
그건 네 안을 더듬는 일이다.”

달삼이 숨을 삼켰다.

“주머니는… 내 안이군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머니는 손이 가장 자주 가는 자리다.”
“습관적으로 만지는 곳.”
“거기서 찾는다는 건…
잃어버린 것이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

달삼은 다음 연을 읽었다.

“둘과 둘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달삼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이건 그림이 너무 답답합니다.”
“길이 왜 돌담을 끼고 갑니까?”

그는 손을 허공에 세워 벽을 만들었다.

“길이라면 탁 트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윤동주의 길은 늘 벽 옆으로만 갑니다.”

청람은 단정하게 말했다.

“그 시대의 길이 그랬다.”

달삼이 더 물었다.

“시대 때문에 시가 좁아집니까?”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시대 때문에 시가 좁아진 게 아니다.”
“시대가 좁아졌는데도, 윤동주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

“좁은 길이라도 걷겠다는 말이다.”

달삼이 조용히 말했다.

“벽을 끼고 가는 게…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는 태도군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벽 옆은 위험하다.”
“하지만 벽이 있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

청람의 말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달삼아, 사람은 완전히 탁 트인 곳에서 더 쉽게 길을 잃는다.”
“막막함은 때로 벽보다 무섭다.”

달삼의 눈빛이 바뀌었다.
돌담이 단순히 감옥의 벽이 아니라, ‘길을 붙잡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달삼은 다음 구절을 읽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달삼이 낮게 말했다.

“그림자가 길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언제나…
밝아질 수 없는 길이네요.”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는 빛이 있다는 증거다.”

달삼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림자가요?”

청람은 단순하게 말했다.

“완전한 어둠에는 그림자도 없다.”

청람은 창가 쪽을 가리켰다.

“그림자는 빛이 뒤에서 밀고 있다는 흔적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방식으로 한 마디를 얹었다.

“윤동주는 어둠 속에서도 빛의 증거를 놓치지 않는다.”

달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다워서.
달삼은 다음 연을 읽었다.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달삼이 잠깐 웃었다.

“선생님, 이건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통하는 건 당연한데…”

그는 눈을 올렸다.

“저녁에서 아침으로도 통한다는 말이요.”
“이건… 돌아간다는 말 아닙니까?”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간다.”
“하지만 윤동주는 ‘제자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청람의 대답은 조용히 반전을 품었다.

“통했다고 말한다.”

달삼이 되물었다.

“통했다…”

청람은 짧게 정리했다.

“윤동주에게 반복은 실패가 아니라 통로다.”
“하루가 무너져도, 또 하루는 온다.”
“그게 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했다.

“희망이 크지 않아도, 끊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달삼은 시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으로 갔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달삼은 ‘부끄럽게’에서 멈췄다.
그 단어는 윤동주를 설명하는 하나의 문장 같았다.

“선생님.”

달삼이 말했다.

“하늘이 왜 부끄럽습니까?”
“하늘은 그냥 푸르잖아요.”

청람은 달삼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부끄러운 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을 보는 자신이다.”

달삼이 숨을 삼켰다.

“그럼 윤동주는… 하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겁니까?”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동주는 하늘을 ‘배경’으로 두지 않는다.”
“하늘은 그의 기준이다.”
“하늘이 푸른데 내가 울고 있다는 건…”
청람은 말을 아주 짧게 끊었다.
“내가 아직 하늘만큼 맑지 못하다는 뜻이다.”

달삼이 한참을 말이 없었다.
문예반실에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그 침묵이 윤동주의 언어와 닮아 있었다.
달삼은 마지막으로 내려갔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달삼이 종이를 접지 않고 그대로 들었다.
그 문장들이 접히면, 자기 마음도 같이 접힐 것 같아서였다.
그는 청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윤동주는 결국 뭘 찾는 겁니까?”
“이 길 끝에 뭐가 있습니까?”

청람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길어지면 이 시의 품위가 사라질 것 같았다.
청람이 말했다.

“담 저쪽의 ‘나’다.”
“잃어버린 게 물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그는 안다.”

달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살아 있다는 건 찾는 거네요.”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아 있다는 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청람은 마지막으로 단 한 문장을 남겼다.

“윤동주에게 삶은 성취가 아니라 탐색이다.”

달삼은 그 말을 듣고 문예반실 문 앞에 섰다.
교복 주머니에 다시 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이번엔 더듬는 손이 아니었다.
자기 온도를 확인하는 손이었다.
복도 밖은 어두웠다.
돌담도 쇠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달삼은 알았다.
길이란, 잃어버린 것을 다 찾고 나서 걷는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하늘은 언제나, 부끄럽게 푸르다는 걸.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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