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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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 앞에서 배우는 것
아침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한 얼굴로 온다.
도시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기 전, 빛은 창가에 먼저 내려앉고 마음은 자연스레 안쪽으로 기운다.
그 고요 속에서 사람은 오래 미뤄둔 질문과 마주한다.
아침에도 같은 물음이 조용히 찾아왔다.
마지막 문 앞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항로 위에 있다. 이름과 언어, 신앙과 풍습은 다르지만,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만은 같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죽음을 먼 곳에 밀어두려 하지만,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 걷는다. 그것은 낯선 타인이 아니라, 언젠가 마주해야 할 또 하나의 얼굴이다.
중국의 한 철학자가 말기암으로 생의 끝을 앞두고 제자와 마지막 시간을 나누었다.
그는 남은 날들을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배움의 시간으로 삼았다. 생명과 사랑, 인간다움에 대해 조용히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이 말은 한 시대를 넘어 인간 전체를 향한 문장처럼 들린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어둠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
우리는 해안에서만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언젠가는 그 물결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심연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귀향이라 부르며, 또 어떤 이는 침묵이라 부른다.
이름은 달라도 그 경험은 하나다. 삶이라는 긴 항해 끝에 맞이하는 마지막 정박이다.
천상병 시인은 죽음을 ‘귀천’이라 불렀다.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 여겼다.
그 말 속에는 비장함보다 고요함이 있다.
또 이어령 선생은 생의 마지막에 불필요한 연명을 거부하고 제자들과의 대화를 선택했다.
그는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고 외려 이해하려 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도 이들의 태도는 닮아 있다.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마지막 문을 잘 통과하려면 그 문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하루를 조금 더 진실하게 살고, 만나는 이를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며, 사소한 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는 일. 어쩌면 그것이 가장 깊은 준비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끝이 있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현재를 온전히 살아간다.
하여, 죽음은 삶을 부정하는 그림자가 아니라, 삶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빛일지도 모른다.
아침의 빛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조용히 앉아 그 빛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모두 다른 길을 걷지만 같은 문 앞에 선다.
문 앞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배운다. 두려움보다 이해를, 절망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법을.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