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경복고등학교 전경 ㅡ 본관 앞 잔디 밭은 겸재 정선 생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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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고교 국어시간이었다.
국어 선생께서
"시인은 거미다"라고 시인론에 대해
하신 말씀이 기억나
몇 줄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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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결, 바람의 문
— 시인과 평론가의 공존 구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은 누에이자 거미다.
자신의 몸에서 실을 토해내는 존재이며, 그 실로 스스로의 세계를 엮어가는 존재다. 누에는 안쪽에서 비롯된 생의 결을 밖으로 밀어내고, 거미는 허공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세운다. 이 두 겹의 운동이 겹쳐질 때, 비로소 시라는 형식이 생겨난다. 시인의 세계는 바깥에서 가져온 재료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래 침잠한 사유와 감각이 응결되어 하나의 결로 드러난다.
이렇게 형성된 세계는 하나의 폐쇄된 구조를 지닌다. 거미줄처럼 정교하고 치밀하며, 그 안에는 시인만이 감지하는 리듬과 결이 흐른다. 타인의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자리, 설명보다 먼저 존재하는 감각의 층위가 그 중심을 이룬다. 시인은 그 안에서 홀로 머문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존재 방식에 가깝다. 스스로 구축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자는, 결국 그 고립을 감당해야 한다.
외려 이 고립은 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 외부의 소음이 쉽게 스며들지 않는 깊이, 그 안에서 시는 자기만의 밀도를 얻는다. 그러나 모든 세계는 닫혀 있는 상태로 지속될 때 점차 내부로 수축한다. 아무리 정교한 거미줄이라 해도 움직임이 없으면 긴장은 풀리고, 결은 느슨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내부를 환기시키는 미세한 진동이다.
그 진동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평론가다.
평론가는 시인의 세계를 해체하려는 자가 아니다. 그는 그 세계를 흔들어 드러내는 자다. 바람이 거미줄을 스치면 보이지 않던 실의 결이 빛을 머금듯, 평론가는 시의 내부에 잠재해 있던 구조를 외부의 감각 속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다. 감추어진 결을 드러내어 타인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평론가는 고립된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존재다. 그 노크는 강요가 아니라 신호이며, 침입이 아니라 초대다. 시인의 범주 안에 머물던 감각과 의미가 타인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길목을 트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때 평론가는 무엇을 덧붙이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결을 밝혀낸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닿지 않던 곳에 닿게 하는 매개로 서 있는 것이다.
하여, 평론가는 바람과 닮아 있다. 머물지 않으면서 흔들고, 소유하지 않으면서 확장시키는 힘. 그 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서 거미줄은 더욱 넓게 퍼지고, 그 긴장은 더 또렷해진다. 시인의 세계는 그때 비로소 자신을 넘어선다. 내부에 머물던 것이 외부와 접속하며, 하나의 고립된 구조가 관계의 장으로 전환된다.
시인과 평론가는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놓여 있다. 시인은 세계를 생성하는 자이며, 평론가는 그 세계를 확장시키는 자다. 하나가 중심을 만든다면, 다른 하나는 그 중심을 외부와 연결한다. 이 둘의 긴장은 대립이 아니라 조율이며, 분리는 단절이 아니라 다른 층위의 협력이다.
하여,
시는 혼자 태어나지만 혼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고립 속에서 세계를 짓고, 평론가는 그 세계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 바람을 타고 타인의 시선이 들어오고, 낯선 감각이 머물며, 새로운 결이 생겨난다.
시인은 누에이자 거미로 존재하고,
평론가는 그 곁을 스치는 바람으로 존재한다.
그 사이에서 문학은 닫힌 구조를 넘어 살아 움직이는 장이 된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