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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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대화, 봄비 속의 깊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말이 넘친다. 말은 관계를 이어 주는 가장 손쉬운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는 때로 너무 길어져, 건너야 할 마음보다 더 멀리 뻗어 나가기도 한다. 그 자리에는 대개 한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놓지 않는 사람. 숨을 고르듯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가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쏟아낸다. 열변은 뜨겁지만, 그 열기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의 말은 자리를 가득 채우지만, 자리는 오히려 비어 간다. 다른 이들의 침묵은 공감이 아니라 틈이 된다.
끼어들 수 없는 틈, 말을 보태기 어려운 거리.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가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문득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내도 남는 것은 적막이라는 사실을. 말이 많았던 하루일수록 마음은 더 비어 있다는 것을. 그때 찾아오는 허망은, 어쩌면 말보다 길다.
그와 달리, 또 다른 자리에는 말이 적은 사람들이 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신사 서너 명이 둥글게 앉아 차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는 길지 않다. 한 사람이 말을 건네면, 다른 이는 짧게 받는다. 목소리는 낮고, 말의 속도는 느리다. 말이 끝난 자리에는 침묵이 자연스럽게 놓인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서로를 편안하게 감싸는 공기처럼 자리를 채운다.
그들은 때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눈빛을 나누고, 미소로 답한다. 그 미소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해의 언어다. 말이 닿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지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기면, 봄비가 가늘게 흩날린다. 비는 소리를 낮추고, 세상의 윤곽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 속에서 매화 몇 송이가 조용히 피어오른다.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꽃봉오리,
이미 봄의 중심에 와 있는 듯한 기척. 그들은 그 장면을 함께 바라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방향을 향해 눈을 두고, 같은 속도로 숨을 고른다.
그 순간, 말은 필요 없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깊이는 말의 길이가 아니라, 머무는 시간의 농도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는다.
참으로 여유로운 풍경이다. 그 여유는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말이 적어도 관계가 줄어들지 않는 자리, 오히려 더 깊어지는 자리. 그것이 진정한 대화의 모습이다.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은 말의 양이 아니다. 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함께 머물렀는가가 더 중요하다.
봄비가 조용히 내리는 그 창가에서, 매화가 피어나는 속도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은 이미 말보다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