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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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피어난 선율
시인은 사물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눈앞의 풍경을 한 번 더 건너가, 그 안에 숨은 또 다른 얼굴을 불러낸다. 그래서 같은 봄을 두고도, 누군가는 꽃을 보고, 시인은 울림을 본다.
어느 시인은 피아노의 선율을 들으며, 그것을 파도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에 비유했다. 건반 위를 스치는 음 하나가 물결을 가르며 솟구치는 생명의 순간으로 바뀌는 장면. 소리는 더 이상 들리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움직이는 형상이 된다.
또 어떤 이는 막 피어오르려는 목련의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것을 오선지 위의 음표로 읽어냈다. 가지 끝에 맺힌 봉우리는 정지된 꽃이 아니라, 곧 울려 퍼질 음의 자리였다. 봄은 그에게 계절이 아니라 하나의 악보였고, 꽃은 그 악보 위에 놓인 침묵의 음표였다.
청연 시인은,
그 목련을 ‘나무에 핀 연꽃’이라 불렀다.
그 한 줄의 명명은 사물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연못 속에서 피어야 할 연꽃이 나무 위로 올라오는 순간, 세계의 질서는 조용히 이동한다.
그 이동은 낯섦이 아니라, 외려 더 깊은 닮음을 드러낸다. 아직 열리지 않은 봉우리의 단정한 곡선, 안으로 모인 생명의 긴장, 곧 피어날 것을 예감하게 하는 고요. 목련과 연꽃은 다른 자리에 있으나,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청연 시인은 그것을 보았다.
이름이 아니라 본질을 보았고, 자리보다 형상을 보았으며, 익숙함보다 닮아 있는 깊이를 선택했다.
그가 올린 영상과 짧은 문장을 마주한 아침, 마음 한편이 조용히 밝아졌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 세계는 전혀 다른 빛을 띤다. 한 송이 꽃이 하나의 계절을 여는 것이 아니라, 한 줄의 언어가 새로운 감각을 열어젖힌다.
이토록 섬세한 눈매를 지닌 시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문득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세상을 쉽게 부르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다시 이름 붙일 줄 아는 사람. 그 깊은 시선이 일상의 표면을 벗겨내고, 그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세계를 드러낸다.
봄은 언제나 먼저 도착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누군가의 언어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침,
피아노의 선율은 물고기가 되어 파도를 뛰었고,
목련의 봉우리는 오선지 위에 놓인 음표가 되었으며,
마침내 한 그루 나무 위에는
연꽃 한 송이가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장면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 속에서,
하루는 이미 충분히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