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를 온전히 읽는 방법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봉우리와 균열 사이에서
— 서정주를 온전히 읽는 방법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들어가는 말
— 한 시인을 온전히 읽는다는 문제


한 시인을 읽는다는 일은 단순히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남긴 언어와, 그 언어가 놓였던 시대와, 그 언어를 가능하게 했던 정신의 층위를 함께 헤아리는 일이다.
시는 한 개인의 감정 표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의 공기와 맞닿아 있고, 역사적 조건 속에서 길어 올려진 언어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응축된 결과다. 따라서 한 시인을 온전히 읽는다는 것은 그 문장을 둘러싼 시간과 맥락, 그리고 그 문장을 낳은 내면의 구조까지 함께 읽어내는 일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을 읽는 일은 특별한 긴장을 요구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두 개의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한국 현대시의 정점에 이른 시적 성취에 대한 찬사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말기 친일 협력에 대한 역사적 비판이다.
이 둘은 서로를 쉽게 지워주지 않는다. 한쪽을 바라보는 순간 다른 한쪽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구조를 이룬다. 그래서 서정주라는 이름은 단순한 문학적 대상이 아니라, 문학과 역사, 미학과 윤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

문제는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취하는 태도가 여전히 반복된다는 데 있다. 시의 아름다움과 언어의 성취만을 강조하며 역사적 책임을 덮어버리는 경우, 문학은 현실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장식으로 축소된다. 반대로 친일 행적만을 전면에 내세워 그의 문학 전체를 부정하려는 시선 역시 작품이 지닌 미학적 성과와 언어적 혁신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은 편의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그것은 복합적인 존재를 단순한 도식으로 환원하며, 결과적으로는 이해가 아니라 판단에 머무르게 한다.
서정주를 둘러싼 논의가 반복해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종 평가를 서둘러 결론으로 가져가려 하지만, 그의 경우 결론은 오히려 유보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단정이 아니라 견딤이며, 선택이 아니라 병치다. 시적 성취와 역사적 책임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선, 다시 말해 미학과 윤리를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침식시키지 않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독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대하는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서정주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문학적 위대함과 역사적 과오를 어떤 방식으로 함께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한국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과제다. 서정주는 그 물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일 뿐이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곧 문학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를 함께 묻는 일이 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출발한다. 서정주를 둘러싼 긴장을 외면하지 않고, 그 긴장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의 시적 성취를 온전히 인정하되 그것이 역사적 책임을 덮는 근거가 되지 않도록 하고, 반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분명히 인식하되 그것이 그의 시 전체를 단순히 소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읽기, 곧 동시적 독해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한 시인을 온전히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얼마나 넓게 보고, 얼마나 오래 머물며, 얼마나 쉽게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있는가의 문제다.
서정주를 읽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묻는다. 문학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과연 그 복잡성과 모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Ⅱ. 가운뎃말
— 시적 정점과 정신의 구조, 그리고 윤리의 균열



1. 시적 성취
— 한국어의 감각과 형이상학의 결합


서정주의 시가 지닌 첫 번째 특징은 언어가 의미 이전에 감각으로 도달한다는 점에 있다. 그의 시어는 설명을 앞세우지 않는다. 독자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촉감과 빛깔, 리듬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빛', '살결', '꽃', '산', '바람'과 같은 단어들은 사물의 이름을 넘어선다. 그것들은 존재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이며, 언어가 사유 이전에 몸에 스며드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때 시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닿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정주의 언어는 한국어가 지닌 고유한 물성을 가장 밀도 있게 실현한다.

그의 시어는 소리와 의미가 분리되지
않는다. 한국어 특유의 모음 중심 리듬, 유연한 호흡, 반복과 여백의 구조가 시 전체를 하나의 음악적 흐름으로 만든다. 이러한 리듬은 단순한 운율을 넘어 존재의 리듬으로 확장된다. 삶의 굴곡, 시간의 흐름, 감정의 파동이 언어의 호흡과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형상화된다.

또한 그의 시는 토속성과 형이상학을 분리하지 않는다. 흔히 토속성은 향토적 정서나 민속적 이미지에 머무르기 쉽고, 형이상학은 추상적 사유로 기울기 쉽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에서는 이 둘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결로 엮인다. 민요적 가락은 단순한 정서적 장식이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는 리듬으로 작동하며, 설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벗어나는 환상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원형적 사고로 기능한다. 여기에 불교적 윤회관과 동양적 무상 의식이 더해지면서, 그의 시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을 하나의 순환 구조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러한 결합은 단순한 사상적 차용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동양적 사유를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감각화한다. 예컨대 무상은 개념으로 제시되지 않고 계절의 변화, 꽃의 피고 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윤회 또한 교리로서가 아니라, 생명이 이어지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반복 속에서 체험된다. 이때 시는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그의 시는 개인적 서정을 넘어선다. 사랑, 이별, 고통, 그리움과 같은 감정들은 단순한 심리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존재 전체를 사유하는 계기로 확장된다. 인간은 더 이상 개별적 주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 놓인 존재, 자연과 연결된 존재, 결국 소멸과 귀속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은 질서 속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존엄을 새롭게 규정한다.

서정주의 시적 성취는 한국어의 감각적 가능성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하나의 언어로 통합해 냈다는 데 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세계가 언어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게 했다. 그 결과 그의 시는 읽을수록 의미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읽을수록 더 깊이 스며드는 구조를 지닌다.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서정시인을 넘어, 한국어로 존재를 사유하게 만든 시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2. 정신사적 측면
— 생명 의식에서 초월 의식으로



서정주의 시세계는 단절이 아니라 흐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시는 한 시점에서 완결된 형식으로 고정되지 않고, 생명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하여 점차 존재의 본질과 시간의 질서를 향해 이동하는 정신적 궤적을 그린다. 이 궤적은 단순한 주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가 단계적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이다.

초기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 생명의 원초성이다. 이 시기의 서정주는 인간을 문명화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본능과 욕망, 불안과 충동이 뒤엉킨 존재로 파악한다. 육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며, 욕망은 억제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를 움직이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을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기준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을 설명하기보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 혹은 그 바탕에 놓인 생명의 에너지 자체를 붙잡으려 한다. 이 시기의 시는 거칠고 뜨겁지만, 그만큼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 의식은 점차 다른 방향으로 이동한다. 중기에 이르면 서정주의 시는 이전의 격렬함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보다 넓은 시야에서 인간 존재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동양적 달관이다. 그는 더 이상 삶을 정복하거나 돌파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삶의 고통과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균형을 찾으려 한다. 이는 노장사상의 자연 순응과 불교적 무상 인식이 결합된 결과다.
이 시기에서 중요한 변화는 태도의 전환이다. 고통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로 수용된다. 시간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더 이상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시간 속에 놓인 하나의 일부로 자리한다. 이러한 인식은 삶의 비극성을 약화시키는 대신, 그것을 더 큰 질서 속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절망을 외치기보다, 그 절망을 품고 있는 넓이를 보여준다.

후기로 갈수록 서정주의 시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는다. 그는 개인적 서정이나 존재론적 사유를 넘어, 전통과 민족적 원형에 눈을 돌린다. 특히 신라적 상상력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는 고대의 시간 속에서 한국적 정신의 근원을 찾으려 하며, 이를 통해 현대의 단절된 시간성을 넘어서는 시적 세계를 구축한다. 이때 전통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정신적 자원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사의 전개는 한 가지 특징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현실을 초월적 질서 속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모순을 정면으로 분석하고 고발하기보다, 그것을 더 큰 시간과 존재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내기보다, 그것을 감싸 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경향은 양면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의 시는 인간을 위로하는 힘을 갖는다. 삶의 상처를 단순히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넓이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직접적 윤리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현실의 부정의나 폭력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그것을 초월의 언어로 전환하는 방식은 때로는 현실을 유예하거나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서정주의 정신사는 생명에서 출발하여 초월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초월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다. 문제는 그 시도가 때로는 현실의 고통을 충분히 직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는 깊은 위안을 주는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3. 친일 협력
— 문학과 역사 사이의 윤리적 균열



서정주의 문학을 논할 때 가장 무겁게 다루어야 할 지점은 그의 친일 행적이다. 이는 부수적인 논점이 아니라, 그의 문학 전체를 읽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수행과 식민 통치 이념에 협력하는 글과 시를 발표했으며, 그 내용은 단순한 시대적 순응이나 침묵의 차원을 넘어 적극적 동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때 그의 언어는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도구에 머물지 않고, 제국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기능을 수행했다. 시인의 언어가 권력의 언어로 전환된 순간이다.

문제의 본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문학은 흔히 개인의 창작 행위로 이해되지만, 시인의 언어는 결코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에게 전달되고, 사회적 공감과 인식을 형성하며, 때로는 시대의 정서를 규정하는 힘을 지닌다.

특히 서정주와 같이 이미 문단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한 시인의 경우, 그의 언어는 단순한 개인적 발화가 아니라 공적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그의 친일 행적은 개인의 윤리적 선택이라는 차원을 넘어, 문학이 권력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읽혀야 한다.

이에 중요한 것은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이다. 특정 시대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행위의 정당화로 이어질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어떤 언어를 낳았고, 그 언어가 어떤 방향으로 사용되었는가를 따져 묻는 일이다. 서정주의 경우, 그의 언어는 한때 폭력적인 제국의 질서를 미화하고,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문학이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구성하고 강화하는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또한 그의 친일 행적이 더 큰 문제로 남는 이유는, 해방 이후 이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공적 책임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물론 시대적 혼란과 개인적 변명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행위는 결국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응답을 요구한다. 자신의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를 깊이 돌아보고, 그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과정이 결여될 때, 그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제로 남게 된다.

이로 인해 서정주의 시적 성취는 더 이상 순수한 미학적 영역 안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의 언어가 보여준 탁월한 아름다움과 감각은 분명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책임을 상쇄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경우, 뛰어난 시적 역량이 있었기에 그 언어가 권력에 봉사했을 때의 영향력 또한 더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그 책임의 무게는 더욱 깊어진다.

서정주를 읽는 일은 문학과 윤리의 관계를 다시 묻는 일이 된다. 문학은 어디까지 자유로운가, 그리고 그 자유는 어디까지 책임을 동반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의 친일 협력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사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이 지나온 역사와 그 안에 남아 있는 균열을 함께 인식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만 그의 시는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드러낸다. 성취와 과오, 아름다움과 균열이 동시에 놓인 자리에서 그의 문학은 단순한 찬양의 대상도, 일방적 부정의 대상도 아닌, 끊임없이 성찰을 요구하는 텍스트로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문학은 다시 윤리와 만나게 된다.



Ⅲ. 맺음말
— 미학과 윤리를 함께 견디는 독해



서정주를 둘러싼 논의는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된다. 문학은 어디까지 아름다움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 역사적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특정 시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전체를 이해하는 방식과 직결된 문제다. 그러나 서정주라는 이름은 그 물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자리에서 놓여 있다.

그의 시는 분명 한국 현대시가 도달한 하나의 정점이다. 언어의 감각적 밀도, 토속성과 형이상학의 결합, 생명 의식에서 초월 의식으로 이어지는 정신의 흐름은 다른 시인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성취를 이룬다.
그의 시를 통해 한국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을 넘어 존재를 사유하는 깊이 있는 언어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문학적 위상은 쉽게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이름은 역사적 균열을 함께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협력은 단순한 시대적 흔적이 아니라, 문학이 권력과 결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 남아 있다. 더욱이 그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책임의식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과거는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문제로 남는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더 이상 순수한 미학의 영역에만 머물 수 없게 되었으며, 언제나 윤리적 질문과 함께 읽힐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서정주를 읽는 가장 온당한 태도는 선택이나 단정이 아니라, 긴장을 견디는 일이다.
그의 시적 성취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언어가 지나온 역사적 경로를 외면하지 않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는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요소를 함께 끌어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과 책임, 미학과 윤리를 동시에 사유하는 독해가 요구된다.

이러한 독해는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명확한 결론을 원하고, 하나의 판단으로 대상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서정주라는 존재는 그러한 단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곧 판단을 유보하고, 모순을 그대로 마주하며, 그 사이에서 사유를 지속하는 일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문학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장이 된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독자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텍스트를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놓인 맥락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스스로 감당하는 일이다.
서정주를 읽는 일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넓은 시선으로 문학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학이 던지는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갈 수 있는가.

서정주는 하나의 결론으로 닫히는 시인이 아니다. 그는 끝내 열려 있는 문제로 남는다. 그의 시는 여전히 읽히고, 그의 이름은 여전히 논쟁 속에 있다. 그리고 그 논쟁 자체가 그의 문학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언제나 인간을 드러낸다.
그 인간이 빛과 그늘을 함께 지닌 존재라면, 그 문학 또한 그러하다.
서정주를 읽는다는 것은, 그 빛과 그늘을 동시에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ㅡ청람 김왕식


□ 미당 성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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