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위에 내려앉은 봄의 빛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여백 위에 내려앉은 봄의 빛





봄날 일요일 아침

아침은 누군가 펼쳐 놓은 흰 종이 같다.
아직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은 채, 빛만이 먼저 내려앉아 여백을 밝힌다. 봄날의 일요일은 그 종이 위에 가장 먼저 스며드는 연한 물빛 같은 시간이다. 서두르지 않고 번지며,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문장이 된다.

창을 여는 순간, 바람은 마치 오래된 편지를 건네듯 들어온다. 겨울이 남기고 간 차가움은 이미 희미해지고, 대신 풀잎의 숨결이 묻어난다. 그 바람은 말이 없다. 그러나 말보다 먼저 이해되는 어떤 온기를 품고 있다.
나무들은 그 온기를 받아 조용히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곧 아침의 언어가 된다.

햇살은 이 시간의 가장 느린 화가다. 서두르지 않고, 벽과 책장과 식탁 위를 천천히 채색한다. 그림자마저 부드럽게 그려 넣으며, 사물들이 본래 지니고 있던 윤곽을 다시 드러낸다. 평일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 아침에는 또렷해진다. 익숙한 컵 하나, 접혀 있는 신문 한 장, 그 위에 내려앉은 빛이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진다.

일요일의 아침은 시계가 아니라 숨으로 흐른다. 분과 초가 아니라,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시간이 만들어진다.
이 시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에 머물 것을 권한다. 그 권유는 강요가 아니라, 조용한 동의처럼 마음에 스민다.

이 아침의 가장 깊은 곳에는 ‘덜어냄’이 있다. 해야 할 일들이 잠시 물러나고, 채워야 할 생각들이 자리를 비운다. 그 비어 있음 속에서 외려 삶은 더 또렷해진다. 마치 잔잔한 물 위에 비친 하늘처럼, 아무것도 담지 않았을 때 가장 깊은 것을 비추는 순간이다.

하여,
봄날의 일요일 아침은 하나의 노래라기보다, 오래 남는 울림에 가깝다. 소리로 들리지 않지만, 마음 어딘가에 가만히 놓이는 여운. 그 여운 속에서 사람은 알게 된다.
삶이란 채워야 할 무엇이 아니라, 때로는 이렇게 이미 충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아침은 *소색인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온히 당신 안에 쌓이고 있다고.


*소색인다 ㅡ 속삭인다의 시어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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