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등에는 13cm의 긴 수술자국이 남았다. 겨드랑이쪽에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켈로이드성 상처까지 남았다. 참 희안하게도, 겨드랑이 쪽 지렁이는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 거울을 이용해야 볼 수 있는 등 쪽 수술자국은 하루에 몇번씩 들여다 보게 됐다.
수술자국은 '환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명제만으로도 옴쭉달싹할 수 없었다. 나는 좀 더 나를 돌보아야했고, 더 잘 먹고 더 잘자야 했다. 이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무겁게 하는 사실일 뿐, 나은 상황을 만들어주진 못했다. 여전히 남편에게 활동보조사는 구해지지 않았고, 나는 매일 간병을 해야했으며, 나의 암에 대한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는 '환자'다.
챗바퀴같이 지루한 간병의 나날을 보내다보면 광고 메일 하나마저 반가울 때가 있다. 그 메일에는 타투를 주제로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라 하겠다)를 찍는데 흉터를 커버 받을 환자를 찾는다는 제안이 적혀있었다. 마침 내게는 흉터가 있다. 게다가 내 기구한 사연은 방송국놈(?)들이 좋아할 만한 소잿거리였고, 산재환자인 남편이 방송을 타게 되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연락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팀이 살고 계신 곳으로 갈게요.”
며칠 뒤, 집 근처의 카페에서 PD와 작가를 만났다. 소탈한 모습의 PD라 사기가 아닐까 약간 의심했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대단한 작품들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숙연해졌다. PD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합법화 되지 않은 타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진부한 목적이 아니라,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는 개체 중에 타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다큐로 제작하려고 한다는 뜻을 밝혔다.
‘매일매일 상처를 보며 우울해하는 나도 치유해줬으면 좋겠다.’
‘내 등에 선명히 새겨진 무거운 십자가를 가볍게 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환자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타투로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출연 계약서를 작성했다.
먼저, 살고 있는 곳에서 다큐의 촬영을 시작하기로 했다. 남편과 나와 딸까지 출연하기로 했고,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겠다고 했다. 난 참 감정의 기복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신기하고 들뜨는 상황에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이 다큐가 잘 되어서 남편의 소송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적어내는 과정에서조차 나는 나를 위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 무거운 장비를 들고 35도를 육박하는 한여름 뙤약볕에 서 있어야 하는 카메라 감독의 안위가 걱정됐다. 어차피 저들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직업이자 보람일텐데 말이다. PD에게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도록 '이런 건 어떨까요?'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좋은 장면이 찍혀 빨리 촬영을 끝내게 되면 그들도 기분 좋아하지 않을까. 그러나 방송이 원하는 방향은 초보 출연자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출연자가 쓸데없는 배려를 함으로 써 딱딱한 장면이 나오게 되자 '좀 더 자연스럽게'라는 주문을 하며 재촬영을 해야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촬영은 사는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극장같은 다큐를 생각했는데, 그런 형식이 아니라 연예인 패널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타투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함께 공감하는 자리도 주어졌다. 그 촬영은 서울의 한 한옥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남편과 딸을 데리고 서울로 가야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편에게 사고가 난 이후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 그나마 남편은 외상성 뇌환자라 혈관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기 때문에 비행기의 탑승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걱정한 것은
"엄마. 밥은 언제 먹냐고!!!???"
남편의 제어력이었다. 탑승 수속부터 비행기에 앉을 때까지 긴 대기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뇌의 활동량이 떨어지니 계속 무언가를 먹고 싶어 했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내게 짜증을 냈고 함께 있는 딸에게도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이런 증상은 전두엽의 손상으로 나타나는 행동장애 증상 중 하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남편을 공항 의자에 앉혀두고 딸과 멀찍이 떨어졌다. 남편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았지만 자리를 이탈하진 않았다. 아마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뇌가 피곤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두었더니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었다.
“안 탈거다!!! 야이 시발년아!!!!!”
사실 더 심한 욕을 하긴 했지만 여기까지만 적겠다. 그렇게 남편은 소리를 지르며 타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모든 이의 시선은 당연히 우리에게 쏠렸다. 남들이 보기에 나의 남편은 그저 성격이 괴팍한 뚱뚱한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편 가까이에 가면 내게 공격을 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남편을 두고 비행기를 탈 순 없었다. 그저 남편의 화가 가라 앉기를 바라야 했다. 무력하다. 내가 남편을 위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그나마 다행히 서울에 도착해서는 방송팀이 데리러 오고가 주었고, 촬영을 할 때도 스탭들이 남편과 딸을 잘 보살펴주어 안정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내게 타투를 해 주게 될 거라는 타투이스트는 예쁘고, 연약해보이는, 그리고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 여성분이었다. 그리고 말보다 눈물을 흘린다고 바빴다. 내 이야기가 그렇게 눈물이 날 만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하도 설명하고 해명하는 시간을 가지며 살다보니 내 이야기쯤은 3자가 말하는 것 처럼 무던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게 과연 내 이야기가 맞는걸까 할 정도로 현실감각조차 없다. 이것이 정말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인생이긴 한 걸까. 아버지와 동생을 암으로 잃고 나에게도 찾아온 암. 게다가 남편은 산재사고로 치매가 왔고 아직 딸은 초등학생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40살이 채 되지도 못했다.
누군가가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이 모든것이 다 거짓말이라고. 자고 일어나면 다 되돌아와 있을거라고. 왠지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기도 한다. 혹은, 암보다는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지구에 부딪히게 될 운석이 좀 더 빨리 떨어져서 다 멸망하면 어떨까.
반짝반짝한 조명과 카메라들 사이에 촌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긍정의 힘을 발산하는 아줌마가 사실은 이렇게 어두운 늪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 다들 실망하지 않을까 싶어 더 밝게 웃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방송은 예능이 아니라 다큐다.
타투는 상처가 없는 곳에 해도 아프다. 생살에 상처를 내어 색소를 집어넣기 때문에 따끔한 고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번 칼을 대고 흉터가 남은 곳에 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고통은 배가 된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짼 곳에 또 째겠다고? 어디 한번 당해봐라!’하며 내 몸이 시위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 시위를 무시한 채 우왁스럽게 타투를 이어나가니 몸이 어떻겠는가. 시위가 들어먹히지 않으니 강제로 드러눕지 않겠는가. 그렇다. 공황발작이 발생했다. 다큐도 이런 다큐가 없다.
내게 타투를 해주던 타투이스트는 놀라다 못해 울었고, 나는 땀을 물처럼 흘리면서도 한사코 괜찮다고 하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10분 정도만 기다려 달라고 미소지었다. 다큐에서 호러물로 바뀌는 순간이다.
어쨌든 공황발작이 끝나도 타투는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간병을 하는 내가 다시 서울에 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날 안에 다 끝내야 했다. 때문에 유튜브 영상도 보고, 노래도 부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아픔을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다시 타투는 나의 ‘고오집’ 덕분에 재개되었고 장장 10시간에 걸친 타투가 완성되었다. 극적인 방송효과를 내기 위해 패널들 앞에서 타투가 공개되었으며 몇 년동안 삼켜왔던 나의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까지 타투를 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나는 그저 내 등에 새겨진 암환자의 훈장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남편을 더 마음껏 간병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아프니까 더 잘 자야하고, 더 잘 먹어야 한다면 그만큼 남편을 방치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뇨 사건처럼 남편의 병세 악화라는 결과로 더 큰 자책감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환자’라는 이름표를 달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내가 아픈 것보다 남편이 아픈 것이 더 힘들었다.
나의 등에 지어진 운명이라는 십자가는 아이리스 꽃으로 가리워졌고, 흉터를 감춤으로써 그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누가 나의 인생을 감히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누가 나의 고통을 선뜻 짊어져 주겠는가? 그렇기에 환자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다큐를 촬영하는 내내 미소를 가득히 띄웠다. 카메라 가득 우리의 웃음만이 담기길, 나의 일말의 슬픔이 담기지 않길, 혹시나 이 다큐를 보게 될 뇌병변 환자의 보호자들이, 소하랑을 기억하는 많은사람들이 '그래도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를 할 수 있도록, 가정 간병이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이 좋은 결정을 하는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이 다큐에는 '내'가 아닌 '소하랑'이 담겨졌다.
웨이브 오리지날 '더 타투이스트' 1편 -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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