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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랑 Apr 25. 2024

조금 다른 형태의 가족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죄인이 되는 걸까. 특히나 나는 더더욱 죽을죄를 진 것만 같다. 엄마와 아빠가 이 꼴이니 벌써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 딸은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응석을 부리지 않는데, 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 잘 안다.


    나도 언젠가, 아빠와 동생이 암 투병을 하느라 엄마가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던 어느날, 내가 조금이라도 짐이 되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딸에게는 늘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고 1차원적인 표현을 해주고 있지만 애초부터 INTJ는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는지라 외부의 도움을 충분히 받기로 했다. 토요일마다 시에서 하는 문화센터에 뮤지컬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춤과 노래로 무언가를 표출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나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홀로서야 한다는 것은 늘 겁이나고 무서운 일이었다. 혼자 학교를 가거나,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진로를 결정하거나. 하지만 그 어린 소녀는 여의치 않은 가정환경탓에 부모에게 두려움을 표현하지 못했고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외로움을 이겨냈다. 말로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워 했던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표출해냈고, 어른이 된 지금도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춰대며 SNS에 기록하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공황이 찾아오지 않았다. 유일한 소통창구였던 남편에게 표출할 수 없는 지금은 글이 대신해주는 것 같다. 그러니 내 딸도 어딘가에 표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본인 스스로 찾을수도 있겠지만, 발견할 수 있는 여러 환경을 제시해 주는 게 내 역할 아닐까. 나처럼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결국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이 많이 쓰라리다.           




    남편의 수술 때문에 함께 집을 비웠던 날. 친정엄마 말로는 친구집에서 잘 놀았다고 했지만 이내 엄마를 보니 또 서운한 감정이 밀려오는가보다.


"엄마. 오늘 뭐해? 재밌는 거 없어?"


    나는 감정에 무딘 사람이라 아이를 살갑게 보듬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방법적인 여러가지를 해주려고 노력한다. 아이도 내가 무언가 해주는게 자신을 위한 일들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제시하는 것들은 '와! 신난다!'하면서 곧잘 따라나서주는 착하고 순한 천사같은 딸이다.      

     

    수박떡바를 만드는 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어른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고작 떡이다. 참 나는 감성이 메말라도 너무 메말랐다. 아니. 그 무엇을 보아도 감정이 들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 같다. 여름이 다가올 것 같은 따뜻한 봄도 그저 낮이라는 햇빛에 지나지 않았고, 마음껏 뽑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텃밭주인의 선심도 내겐 그저 부담스러운 스몰토크였다. 나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같은 공간에만 있을 뿐, 아이와 공유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내가 만들었어. 먹어봐"     


    딸이 내민 수박모양의 떡을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어차피 다 계량되어있는 재료이니 맛은 일률적일 것이다. 이 떡에서 아이의 보람과 마음을 맛보아야 할텐데 왜 퍽퍽한 질감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껏 웃는얼굴로 딸을 한아름 안아주었다.


"맛있네. 정말 고마워. 다음에는 다른맛으로 또 만들어줘."     



     

    딸의 학교에서 부모참관수업이 열린다는 안내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던 1학년, 마스크에 막혀 친구와 말도 못 섞던 2학년을 지나 3학년이 되니 코로나가 많이 완화되어 부모를 학교에 초대할 수 있게 되었고, 학교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들썩인다. 나는 내가 선생시절에 부모참관수업을 했던 때를 떠올려봤다. 너도나도 잘 빼입은 부모들이 사진을 찍어댔고, 아이들은 평소와 다르게 의젓한 모습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래서 평소보다 좀 더 빡세게 꾸몄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는 꾸미고나면 얼굴이 환해보였는데 하이라이트를 쳐발쳐발해 얼굴이 밝아지지 않는것일까.


    학교 운동장에서부터 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한다. 코로나 여파도 있겠지만 나는 그다지 사회적인 성격도 아니고, 남편의 간병에 매진하느라 딸의 학교생활에는 거의 개입을 해 본적이 없는지라 아는 학부모가 없다. 그나마 아는 옆집의 이웃사촌은 활발한 사교성으로 이미 한무리의 사이에서 대화에 한창이었다. 난 이런 상황이 그렇게 어색하진 않지만 벌써부터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딸이 이런 나의 성격을 닮아서 그런게 아닌지 괜히 미안해진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학교다. 거짓말처럼 타일바닥이 일어나 있었고, 계단 손잡이가 시골 할아버지의 팔뚝처럼 낡았다. 하지만 그 세월이 너무나 가상한 멋진 학교다. 회색빛의 계단을 밟아 교실로 들어가니 딸이 보인다. 나를 보자마자 상기된 얼굴을 하고 다가와서는 손목을 잡고 자신의 작품 앞, 책상 앞, 사물함 앞으로 이동시키며 안내했다.


    남편의 사고 날, 나의 시간도 멈췄다. 남편과 함께할 수 없는 시간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 있어야 할 그때의 6살짜리 딸이 어느새 9살이 되어 있는 현실에 새삼 놀랐다. 의젓하게 자기소개를 하게 될 때까지, 학교 숙제를 혼자하게 될 때까지 같은 시간을 걸어가지 못하고 홀로 걷게 한 어미는 더더욱 죄인이 된다.


    붉어진 눈시울을 외면하려 시선을 돌리니 부모가 함께 아이를 응원해 주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남편도 딸바보인데, 건강했다면 누구보다 딸의 수업참관을 기대하고 연차를 사용해가며 부리나케 달려왔을텐데. 결국 아쉬움은 눈물이 되어 체념하듯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남편은 내 곁에 있지만 더 이상 남편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음을.  

    남편과 나는 더 이상 시간들을 공유할 수 없고, 남편은 현재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모순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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