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는 마치 학원에 가기 싫은 초딩의 마지못한 발걸음처럼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말했다.
"MRI 결과가 나왔는데, 암세포가 뼈로 전이 되었다는 소견에 무게가 더 실려있어요“
나는 한국인이고, 교수도 한국말을 하고 있지만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힘들게 간병을 하는 와중에 없는 짬을 어떻게든 만들어 관리를 해 왔던 과정과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일것이다. 결과가 다른 값을 나는 배신이라 부른다. 배신감은 점점 감정을 고양시켰다.
‘네? 뼈 전이라니요? 무슨 말이세요? 제가요? 제가 수술 했잖아요. 방사선도 했잖아요. 항암 그거 안 한다고 고집 피워서 지금 심술 부리시는거죠? 아니면, 그동안 안정을 취했어야 하는데, 계속 간병을 고집해서 그런 걸까요? 그래도 사이사이에 열심히 운동도 했는데 무슨 이야기세요? 이렇게 얼굴이 건강한 환자가 있나요?’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말들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할 뿐, 멍청한 변명들이 입술앞에 나열되었다.
"아니... 아니요... 저 등이요... 이제요… 안 아프거든요. 사실 교수님께… 그… 말씀 안 드렸는데요, 예전에… 제가 사실… 골프 치다가 연습을 좀 많이 하긴 했는데요, 등에서 뚝 소리가 나고… 제가 다른 여자들 보다 힘이 좋거든요. 하하. 근데 이제 안 아파요. 진짜예요. "
땀을 뻘뻘 흘리며 횡설수설 등이 아팠던 이유에 대하여 설명했다. 교수는 나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는 고쳐 앉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뼈 전이라는 게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뼈 전이가 되어 약해진 곳에 충격이 가해져서 골절이 올 수도 있고, 골절이 와서 약해진 곳에 뼈 전이가 생길 수 있어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조직검사를 해봐야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어요."
배신이다. 그동안 내가 전이를 막기 위해 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멘탈이 완전히 조각나서 찢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말하는 한마디에 다시 찢어진 조각을 붙여보려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 조직검사는 어떻게 하는데요?"
"척추에 있는 암 조직을 긁어내서 하는건데, 척추마취를 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요.”
척추마취의 부작용은 사지마비다. 확실하지도 않은 조직의 검사를 위해 척추마취를 해야 한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교수님. 제가 원래 목 디스크 보던 병원이 있어요. 저 그 병원가서 이 영상 보여주고 의견을 들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대신 결정이 너무 늦으면 곤란합니다."
교수는 뼈 전이에 대한 결과가 적혀있는 소견서와 영상CD를 가지고 가라고 일러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아직 울 필요가 없었다. 아직 내게는 척추병원의 의사가 해 줄 희망적인 이야기가 남아있다. 유방 외과 교수는 척추 전문의가 아니니까 뼈 전이에 대해서는 전문적이지 않을 것이다. 척추 전문의에게 가서 물어보자. 아닐 거라고, 아닐 거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40분 거리의 척추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어두고 의사를 찾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진료 예약을 했다. 괜히 호들갑을 떨면 더욱 더 뼈 전이에 무게를 두고 영상을 볼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이 초조하지만 그것조차 인내하며 억겁과 같은 30분의 대기시간을 견뎌내고 의사를 만났다.
"...음... 뼈 전이 맞는 거 같은데?"
마치, 척추 전문의에게 듣는 뼈 전이에 대한 의견은 사형선고 같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내 자율 신경계.
“그래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와는 다르게 손가락 끝부터 덜덜 떨려왔다.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고, 관자놀이 부근부터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느껴졌을 때, 의사와의 대화가 끊겼다.
"괜찮으세요?"
"...저... 죄송하지만 저 안정제 좀 놔 주시면 안되요?"
"되죠.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좀 쉬다가 가세요."
의사는 비정상적으로 땀을 흘려대며 절여진 배추가 되어가는 젊은 환자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흔쾌히 처방을 내어주고 간호사를 호출하여 비척이는 나를 부축하게 했다. 아직도 내 인생에서 감내해야 할 게 있다니. 아직도 올 게 있다니. 링겔을 맞지 않는 팔로 입을 꾹 틀어막고 옆에 누워있는 환자가 듣지 않도록 울음을 삼켰다.
가만히 누워 다음 스탭을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뼈 전이가 맞는 것이든, 믿지 못하는 것이든, 검사든, 치료든 받아야 하는 상태. 이전과 같은 태도로 내 병을 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딸은 친정엄마든 이웃사촌이든 맡길 수 있지만 남편은? 남편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건강보험으로 입원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경제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급해져 아직 반이 남은 링겔의 도르레를 풀어 빠르게 수액을 혈관 속으로 집어넣었다. 내가 편안하게 누워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산재환자는 입원치료를 받다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 통원 치료를 하게 된다. 통원치료를 한다는 것은 상태가 악화되지 않으면 입원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남편의 상태는 악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수시 간병을 하며 돌보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뇌병변 환자이고, 산재로써 입원하여 보호하고 치료를 받으려면 근로복지공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수시 간병을 받을 수 없는 남편의 현재 상황을 읍소하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으로 달려갔다.
"아....어떡해요..."
남편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침착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뼈 전이가 적혀있는 소견서를 내밀었다. 천천히 읽어본 직원은 나를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으로 제발 날 불쌍히 여겨줘서 남편을 입원시켜줬으면 좋겠다.
"부탁드릴게요. 저 말고는 보호자가 없어요. 그런데 건강보험으로 입원할 입원비도 없어요. 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일단 3개월만이라도 입원을 시켜주세요. 그동안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다시 받든 항암을 하든 뭐라도 해보려고 해요. 그 후의 문제는 제가 또 해결해볼게요."
"보호자님은... 괜찮으세요?"
괜찮냐고? 나는 괜찮은걸까?
"...아니요.."
직원의 진심 어린 걱정에 참았던 눈물이 둑처럼 터졌다. 누군가의 따스한 한마디는 내가 시간을 들여 겨우 쌓아 올린 성벽을 한순간에 녹일 수 있는 잔인함을 가졌다. 간신히 잡아 왔던 무언가가 끊어지면서 눈물도, 콧물도, 아무 말도 모두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그다지 기억에 다 담기진 않지만 도와달라느니, 죄송하다느니, 척추를 뽑겠다느니, 맥락에도 맞지 않는 아무말을 나열하며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직원의 팔을 붙잡고 울다 부끄러워져서 황급히 수습한 후 공단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몇 시간후, 남편의 3개월간 입원이 승인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85년생 소띠의 소고집이야말로 최고의 고집 아니겠는가. 그 진단을 받고도 다시 돌아와 유방 외과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뼈 전이가 아니라고 우겼다. 골프 사건이 내게는 확실한 계기였기도 했고,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서 척추마취를 하는 것 역시 위험부담이 있다고 판단한 교수는 신경외과의 의견도 들어보자며 협진을 내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단이 뭐가 되었든 환자와 소통하며 병을 해결해 나가려 하는 의사가 명의라는 생각이 든다.
협진으로 만나는 교수는 본인의 고유한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환자를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뚱한 표정으로 건성건성 진료하다가 영상을 보곤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영상의학과 교수와 한참을 통화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일단, 3개월에 걸쳐서 CT를 좀 찍어봅시다. 그래서 변화 추이를 지켜보고 나서 수술을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뼈 전이가 맞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지금과 달라지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암 환자로서 의사에게 듣는 이 말은 참으로 냉정하고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살날을 벌 수 있는 도박과 같은 것이다. 뼈 전이가 맞다고 하더라도 항암제를 투여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 유방암 환자에게 뼈 전이라는 진단은 4기, 그야말로 사형선고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3개월간에 찍게 될 3번의 CT에 많은 것을 내려놓는 것 뿐이다.
나는 여자이자 아줌마이지만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병원도 이곳저곳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경험과 경력이 많은 명의는 존재하겠지만, 경험이라는 건,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 대한 진료 시간이 쌓이다 보면 ‘나의 명의’가 탄생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지라 내원하는 대학병원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모두들 하나같이 '암'이라면 서울로 가 보기를 권했다.
지인들은,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때도, 부산에서 생소한 이름의 ‘광배근 피판술’을 하던 때도, 결국은 뼈 전이 판정을 받은 나를 들들 볶으며 '그것 보라'면서 서울에 위치한 대학병원의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어쨌든 뼈 전이를 확정 짓기 위해서라면 조직검사를 해야 했고, 어느 병원을 가든 척추마취를 포함한 수술을 답으로 내어놓을 것이다. 수술한 지 불과 1년 만에 다시 수술대에 오르고 싶지 않았고, 뼈 전이라면 통증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사라졌기 때문에 경과 관찰을 더 해보는 게 현명한 거라는 변명을 하며 둘러댔다.
하지만, 끼리끼리 논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만큼 징글징글하게 끈기가 넘치는 지인들은 대리 예약이라도 잡으려고 했고, 그 소중한 마음을 더 이상 저버릴 수 없어 못이기는 척 서울 쪽 병원의 명의에게 예약을 했으며, 2주 뒤에 진료를 볼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나는 그다지 결과를 알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