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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랑 May 23. 2024

소명, 그리고 순명

            아빠는 출생신고서의 이름란에 세례명을 적었다. 물론 신생아가 종교를 선택할 수 없었겠지만, ‘순명’하는 ‘소명’은 태초부터 부여받은 모양이다.


             천주교인들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10살이 되면 '성체'를 영하기 위한 첫영성체를 하게 되는데 딸에게 그 영광의 시기가 도래했다. 첫영성체를 하기 6개월 전 겨울부터 성체를 영하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교리가 시작되었다.      


            종교는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과 연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라 아이들의 종교교육은 당연스럽게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첫영성체‘교리는 부모와의 연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인지가 떨어지는 남편을 데리고 지친 몸을 이끌며 방사선 치료를 다니던 때와 겹치고 말았다. 게다가 코로나로 온 가족이 격리된 상태에서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을 잃으며 '이 년아 미친년아' 하며 욕바가지를 만들어 마음에 하루종일 못질을 해댔다. 딸도 함께 격리 중이었으니 어땠겠는가. 고스란히 두 눈과 귀에 새겨질터. 사고 전, 딸바보 남편은 딸에게 단단한 애정의 성벽을 쌓아두었고, 남편의 이상행동마저 이해하는 꼬마 성녀가 탄생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단다'라고 말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이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내다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한 톨의 의심을 하지 않을까.     


            게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병에 집안일을 끝내고 딸과 함께 기도문을 읊는 '숙제'를 해야 했는데 마음으로 해야 하는 기도를 '숙제'로 해내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 아닐 수가 없다. 하느님께 눈물로써 드렸던 감사와 믿음이 '숙제'로 변질되는 사실 역시 견딜 수 없었다. 첫영성체가 거행될 날짜는 다가오고 경건해야 할 준비는 누군가의 기준에 미치지도 못했다. 딸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신경 써주지 못했음을, 나의 부족함을, 지금 이 상황을 부정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마침 부모교리 참석율이 제로에 수렴하는 나를 달래는 수녀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올해는 첫영성체가 힘들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내 후회할 걸 왜 그랬을까. 수녀님은 내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다. 먼저 나서서 자발적으로 나를 설명하는데 서투른 나는, 그저 멋쩍은 듯 웃으며 '남편이 많이 아파서 딸 첫영성체 준비가 좀 어렵습니다'라고만 말했던 터라 이렇게 과민 반응하는 게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수녀님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딸을 위해서 조금 더 힘내자고 응원해주셨고, 포기하고 싶은 '소명'을 겨우겨우 끌고 기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딸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조금은 딱딱한 얼굴로 미사에 참여했다. 이마에 물을 흘려 받고, 입으로 성체를 영 했다. 근처에는 부모들의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나지막이 제대 가운데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분의 손을 놓고 싶어진 순간마다 그분은 기어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기어코 포기하고 싶은 날이 숱했지만, 저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와 가족이 그분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계속 믿음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하게 하신다. 그것을 내가 지금 깨닫고 있는데 어찌 포기할쏘냐.     


"엄마! 예수님의 몸은 좀 사실 맛있더라?"     

"그래? 엄마도 어릴때 그랬던 거 같아."          


             그래. 그분이 다 해주실 것이다. 나는 믿고, 내가 할 일을 할 것이다.




             남편은 산재환자다. 2년 동안 들들 볶았던 민사소송이 드디어 막을 내린다. 남편에게 발생한 심정지와 두개골 분쇄골절, 다발성 열상 및 구획증후군 등은 ’골절‘이란 단 두 단어로 간소화 되어 재해신고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열심히 일한 죄가 무엇이길래 남편의 시간들이 묻어져야 하는 것일까. 그동안의 재판에서 사업주는 ’근로자에게 잘못이 있다‘, ’안전관리를 충분히 했다‘, ’우리도 다쳤다‘, 등의 주장을 해 왔지만, 그런말들로 남편에게 발생한 사고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건조한 법정의 형광등 아래에 그날의 기억이 흝어진다. 휴가를 떠나기로 했던 남편의 퇴사 날. 남편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살아만 있어 달라는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준 남편은 이게 산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살아만' 있게 되었다. 남편의 사고 이후,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 모든 행위와 대상에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제로 알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야 알게 되는 인생의 철학 따위를 알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2년 동안 이루어진, 그야말로 ’개싸움‘이었던 이 재판의 판결이 최종적으로 내려졌다. 사업주에게는 남은 인생동안 평생을 벌어도 만질 수 조차 없는 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아마 그 배상은 받아보지도 못한채 판결문은 한낱 종이쪼가리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미처럼 일한 남편의 시간을 보상해 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송 뿐이었다.



             찰나는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그 찰나는 당신들이 점심을 빨리 먹으러 가기 위해 지키지 않았던 안전 레버 하나, 공사기일을 당기기 위해 실시하지 않은 안전교육 하루, 공사 수주를 위해 묻은 가벼운 산재사고. 그 찰나는 분명히 당신들의 경각심을 무너뜨리고 삶을 뽑아버릴 것이다. 나는 법정에 서서 다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부딪히고 깨지며 걸어온 이 길을 누군가가 걷게 두지 않겠다고. 일하다가 다친 상처를 찢어발기는 잔인한 짓을 방관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내 안에는 살아야만 하는 또 하나의 '소명'이 자리잡았다.     




            근로복지공단의 입원승인으로 남편은 3개월간 요양병원의 보호를 받게 된다.      


“아빠,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돼.”     


            딸은 아쉽다는 듯 남편을 안아주며 토닥이지만, 씰룩이는 입꼬리는 감출길이 없다. 나라도 3개월간의 간병 자유는 휴가나 마찬가지니까. 아이는 죄가 없다.

            유방암 수술을 위해 남편의 보호입원을 부탁했을 때는 ’유방암은 회복이 빠르대요‘, ’유방암은 암도 아니라던데요‘, ’저희 이모도 유방암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괜찮아요‘ 등등 희망찬 이야기를 해 주길 바빴던 의료진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뼈 전이로 남편을 입원시키는 것이라고 하자 태도가 아주 다르다. 요양병원에는 암환자들이 요양을 위해 많이 찾는다. 그러니 그들도 뼈 전이가 발견되면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뼈전이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상황과 스트레스만으로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긴 하다.     

             남편은 어렴풋이 아는 것 같다. 내 낯빛이 너무나 어둡고, 내가 예전처럼 밝게 웃으면서 배웅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너무 무리하지말고. 나는 잘 지내고 있을게. 너도 병원 잘 다녀야 해."        

  

             눈가가 뜨거워졌다. 남편은 5분이면 모든 것을 잊는 치매 환자. 본인이 환자인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는 걸까. 내가 병원에 다닌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내가 무리한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내 눈빛, 내 숨소리, 내 몸짓 하나만으로도 나의 하나하나를 다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내 반쪽.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오롯이 견딜 수나 있을까.

             입원을 시키기 전부터 분리불안이 생길 것 같다.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을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남편이 가는 뒷모습과 잔상까지 눈에 담아두었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왠지 그랬다가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꼭 다시 데리러 올게.'       

   

내가 살아야 딸도, 남편도 사니까.      

살자. 살아야 한다.                   

  



             남편을 보내고 나서야 생각을 차곡차곡 정리해 봤다. 아무리 의학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라 하더라도 세포를 직접적으로 뜯어내어 관찰하는 조직검사를 하기 전까지 뼈 전이의 확진은 내려질 수 없다. 사람은 어쨌든 희망을 먹고 사는 생물이 아니던가. 개미똥꾸멍만한 가능성은 나를 살게 했다. 창고문을 열어 처박아둔 골프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뼈 전이가 아니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자 골프장의 남아있는 대여권이 아까워진 대한민국 K-아줌마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친정엄마는 하나뿐인 딸의 뼈 전이 소식을 듣고 가장 자신 있는 요리인 잡채와 콩국을 하셨다. 땀을 뻘뻘 흘리며 딸네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빌어먹을 골프채를 안고 있는 딸을 보니 뒷 목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너는 지금 그러고 싶니?"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내 삶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라 여긴다. 나에게 뼈 전이가 생겼다고 해서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고, 내가 일주일 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삶을 후회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일들을 할 것이다. 당신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내가 사랑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사랑해주고, 내가 서 있는 곳에 나라는 존재를 남길 수 있도록 힘쓰는 것. 그런 것들을 해야 할 것이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찾아 헤메야 할 것이다. 누구도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하지 않던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의 인체는 상당이 잘 짜맞춰진 작은 우주같은 것으로 신체가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지고, 정신이 약해지면 신체도 약해진다. 흔히들 '정신력'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정신이 건강해야 그에 해당하는 호르몬들이 나오고, 그들은 내 몸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선 위에 악보를 그리듯 세포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며, 장황한 화학반응을 연주하며 우리의 몸은 완성된다.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은 장조일수도, 단조일수도, 못갖춘마디일 수도, 미완성인 채로 끝날 수도 있다. 어떤 인생을 연주할지는 결국 내게 달려있는 것이다.        

   

             불우했던 가정환경도, 하나뿐인 꿈이 떠나갈 때도, 남편과 보낸 20년의 기억이 내게만 남게 된 악랄한 그 사고도, 욕설과 폭력에 노출된 채 간병을 하는 지금도, 그걸 지켜보고 있는 딸의 두 눈을 가리고 싶은 때에도, 아빠와 동생을 앗아간 암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도. 이 역시 주어진 ‘소명‘이라면, '순명' 하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면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찾는 것은 나의 몫일터.


            그렇게 '나는 나답게', 나의 결정을 모두가 존중해주길 바라며 다니는 대학병원의 건물 한 켠에 있는 사무실에 들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장기기증등록은 6년 전에 미리 해뒀는데, 암 환자의 장기를 받아주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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