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맛있는 치즈가 있다고 한들, 견과류를 먹는 시골 쥐의 입맛에 맞을 리가 없다. 아무리 지하철이며 버스노선이 잘 되어있는 서울이라 할지라도 슬로우시티 김해인이 보기엔 그저 갑갑한 교통체증에 불과할 뿐. 정오 남짓한 시간이 되었건만 여전히 많은 차들은 도로를 채우고 있었고, 시골쥐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어플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예약해 둔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초행이지만 병원 내부는 대개 비슷한 편이다. 영상CD를 등록하는 기계를 제일 먼저 발견하여 길게 늘어선 접수대기표를 뽑아들고 CD등록을 먼저 하기로 했다. 기계 두 대를 차지하고 CD 두 개를 동시에 넣는 멀티플레이를 선보였건만 영상이 많은 건지, 기계가 먹통인건지, 오류가 난 건지, 30분이 넘도록 기계는 로딩막대기만 선보인다. 어차피 의사가 나에게 할 말은 한결같을텐데 여기까지 와서 사형선고를 또 들어야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인들의 협박어린 부탁을 들어는 줘야 할테고... 회피하고 싶은 현실은 마주해야 하고... 일단 오긴 왔지만 이러한 이유 덕분에 서울은 더더욱 싫어졌다.
남쪽나라 병원에서는 자신의 차례가 늦어진다 싶으면 간호사 데스크에 참새처럼 사람들이 달라붙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언제 진료보노?"
"내가 지금 얼마나 기다릿는데 아직도 내를 진료를 안보는거가? 어이?"
여러 연유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매번 보던 경상도 시골쥐는 좌불안석이다.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서울인들이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걸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다는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초조한 사람은 나 혼자 뿐 인 것만 같다.
맞다. 나는 긴장한거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우기고 있지만 혹시나 하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두려워할 때 어떻게 했더라? ...모르겠다. 늘 남편이 숨 쉬듯 곁에 있었는데. 이렇게 힘들 때 남편이 옆에서 뭔가 해 줬던 것 같은데. 나 혼자서 이 많은 미래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서글프고 초조한 심장박동을 내려놓기 위해 심호흡이며 명상이며 안간힘을 쓰다 보니 오고야 말 시간이 닥쳤다.
“들어오세요”
병원 홈페이지에서 미리 봤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보인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감상은 뒤로 미뤄두고, 준비해 온 서류를 가방에서 꺼내 보이며, 사건들의 시간경과를 표시한 달력을 꺼내어 상세히 설명했다. 이 사태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고, 진부하고 뻔한 질문을 던졌다.
"뼈 전이가 맞을까요?"
"결론적으로는 지금으로는 확답할 수 없다. 가 맞습니다. 확답을 하려면 조직검사를 해야하구요.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쉽게 조직검사를 할 수 없어요. 영상상으로는 뼈 전이가 좀 더 진행되어야 안전하게 조직을 긁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즉, 현재로서는 추적관찰을 해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뼈 전이가 맞다면 현재 하고 있는 호르몬치료에서 약물을 변경하는, 평생의 치료계획을 바꾸어야 하는 진단이 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해요."
교수는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 한 호흡에 길게 설명했다. 나와 같은 환자들을 수십, 아니 수백, 수천명은 만나보았을 것이다. 이 답변은 그야말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같은 것이었다. 교수의 답변을 듣자마자 소화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가벼워졌다. 남쪽나라교수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 답변은 ‘사형선고’가 아닌, ‘추적관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더 도와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죄송하네요. 먼 길 오셨는데요."
화룡점정.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병원의 유방암 ‘명의’에 걸맞은 마지막 대사다. 환자들은 다들 이런 인간다운 마음을 나누기 위해 ‘명의’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미 나는 충분했다.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은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해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진료실을 나왔다. 서울이 좀 좋아질 것 같다.
몇일 후, 원래의 병원으로 방문하여 서울에서 진료 본 내용을 공유했다.
"11월에 찍을 CT에서 뼈 전이에 대한 추이가 나타나면 조직검사를 해야겠다는 확신이 저도, 교수님께도 들 테니 그때까지는 호르몬치료에 대해 꾸준히 치료하겠습니다."
“음…그러면, 뼈 전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추적검사를 하는 것으로 하자면, 머리CT도 추가해서 같이 좀 봤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척추랑 머리가 가까우니까요.“
“마다할 게 있나요. 그렇게 할게요.”
의사란 모름지기, 자신의 환자가 완치되는 것을 가장 원한다. 그러니 너무 의사에게 적대심을 가지지 말자. 의사는 하루에 몇십여명 이상의 환자를 마주한다. 수술도 안 하겠다, 항암도 안 하겠다, 추적관찰만 하겠다는 가난뱅이 고집불통 환자는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괜히 자격지심 가지지 말고 나의 상태를 상세히 알리고 내 생각을 알리고, 함께 치료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진심을 전하자. 나는 그러한 자세로 남편과 나의 병을 마주해 왔다. 그 덕에 다른 복은 없어도 의사복은 있는 편이다.
남편이 사고가 났을 때 즈음,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했던 커뮤니티 카페에서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 있다. 일명 '브레인빌리지'식구들. 환자를 간병하는 길이 너무나 멀고 험해서, 국가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이 더럽고 치사해서. 뇌마을을 만들고 우리끼리 살았으면 좋겠다고 꿈에 부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 중 마음맞는 사람들이 뭉쳤다. 그들은 남편처럼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친 사람, 고혈압 때문에 뇌출혈이 온 시어머니, 심장수술을 하다가 뇌출혈이 온 남편, 수영을 하다 뇌경색이 온 아내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이유로 다른 세계를 살게 된 사람들을 간병하고 있다.
그 중 자가면역질환을 앓다 상세 불명 뇌염으로 3년 동안 투병하던 언니가 있다. 뇌가 알 수 없는 병마에 잠식당해 사망선고를 수없이 받고, 이에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지만 끝끝내 의식 하나만은 놓지 않았던 ‘희망’ 그 자체였던 언니. 온몸에 구멍이 난 욕창도 기적적으로 치료되었고, 패혈증과 폐렴도 몇 번이나 이겨냈다. 하지만 3년의 투병 끝에 결국 하늘로 소풍을 떠났다. 시골쥐가 소식을 듣고 서울행 비행기에 굳이 몸을 실어야만 했을 만큼 언니는 내게 있어서도 ‘희망’ 이었다.
비록 실제로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지만, 해맑은 영정사진을 마주하니 마치, 어제 본 사람같다. 고생했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열심히 싸워왔고, 편히 쉬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사람이다. 닫힌 입을 대변하듯 하고 싶은 말은 두 눈에서 쉼 없이 흘렀다.
"언니. 미안해요. 인사는 못 하고 배웅만 해서."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이별이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이별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미련한 존재가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이렇게까지 극한의 고통을 받아야만 ‘내가 사랑했구나’, ‘내가 그때 그랬더라면’을 알 수 있게만 되는 것일까.
남편의 사고와 언니의 발병은 비슷한 시기였다. 그리고 남편과 언니는 패혈증을 서로서로 이겨냈고, 브레인빌리지 식구들은 옵티머스프라임이라느니, 범블비라느니 하며 그들의 단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추켜세웠다. 그들의 살아있음이 남은 환자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즉, 언니의 죽음은 내게 있어도 희망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희망의 ‘토템’이 사라지니 신앙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간신히 잡고 있는 지푸라기가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니의 남편이 장례식장에 오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느라, 장례식비용을 계산하느라, 음식값을 결재하느라 너무 바빠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었다. 하지만 이 슬픔은 리바운드되어 엄청난 무게로 들이닥친다는 것을 먼저 겪어봤던 터라, 장례 후 2달 동안만 부모님 댁에 가서 지내라고 일러두었다. 물론 2달이라는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공황 환자 주제에 정신과약은 싫어한다. 으레 ‘정신력으로 버텨라’고 하는 꼰대중의 한명이 나이기도 하고, 남편의 행동장애가 정신과약 하나에 천차만별로 반응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다보니 더 그렇다. 저 작은 약 한알이 인간을 조종한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그래서 ‘자가’로 약을 점차 줄여나가다가 끊어버렸다. 하지만 정신적인 병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회복되는 병이 아니다.
감기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 우리몸의 면역력이 물리쳐야 하고, 우울증이 생기면 마음의 힘(이하 ‘마음력’이라 하겠다)이 우울증을 물리친다. 우리몸의 면역력이 좋아지려면 운동과 음식, 수면으로 조절하는데 마음력은? 마음력이 좋아지는 방법도 모른 채, 마음력이 좋아졌는지 어쨌는지 확인할 길은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상태에서 혼자 약을 끊어버리면 오히려 어떠한 계기로 증상이 왔을 때 부메랑처럼 돌아와 타격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정신과약을 멋대로 끊어버리면 큰일이 나게 되는데, 어떠한 큰일이 나게 되는 걸까.
얼마 전, 하늘로 소풍을 간 언니의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였을까. 급격하게 심박이 빨리 뛰는 증상이 심해졌고, 먹어도 토할 것 같았으며, 먹지 않아도 토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아 산소캔을 사서 흡입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뭔가 죽을 것 같긴 한데 우울한 느낌은 없어서 체력이 떨어져 그런 것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버티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괜찮아지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가면 나을까 했지만 운전조차 힘들어서 5분 운전하고 다시 돌아와서 누웠다. 그나마 앉아서 컴퓨터는 할 수 있었는데, ‘휴가갑니다’ 출판을 위한 탈고 중,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을 꺼내는 일을 하면서 정신적 데미지를 계속 입었다. 머릿속에 나쁜생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이 상태로 암이 전이가 되면 어떡하지’
‘죽으면 몇 일 내로 죽는거지’
‘내 통장 비밀번호는 누구한테 알려주지’
내일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통장과 보험 약관을 잘 보이는 곳에 옮겨놓았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필요해보였다.
암이 발병하고부터는 수면을 8시간은 채우려고 어떻게든 노력을 해야 잠을 잤는데 갑자기 별 노력없이도 하루종일 잔다. 낮잠도 6시간을 자고, 밤잠도 10시간을 잔다. 아이마저 내팽겨치고 견딜 수 없는 졸음에 속절없이 잠들었다. 일주일을 그렇게 숲속의 공주처럼 누워만 지내다가 정신과 외래를 가야만 하는 날이 되었다. 정말 죽겠어서, 속이 안 좋아서 토할 것 같은데, 다리가 무거운데, 일단 가야 해서. ‘저 약 끊었어요~ 잠도 잘 자요~’하고 자랑스럽게 교수에게 말해보려고. 그야말로 정신력으로 병원에 꾸역꾸역 기어갔다. 바깥공기를 쐬었것만 여전히 토할 것 같아서 비닐봉지를 따로 챙겨왔다.
교수와의 진료를 통해 나는 속이 좋지 않은것도 아니고, 체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적응장애가 심각해져 아주 위험해진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끌한 목소리를 쥐어짜 고집을 피워본다.
"교수님. 저는 괜찮은데요."
"제가 보기엔 안 괜찮아요."
교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줘야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겨우 알아챈다.
그렇구나.
나 안 괜찮구나.
난 아직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구나.
내 몸을 좀 더 보살펴야 하는구나.
좀 더 조심히 살아야하는구나
나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어 위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는 내 요구에 따라 약을 조금은 경감해 주었지만 절대 혼자 끊을 생각하지 말 것을 재차 일러주었다. 또한 자신의 상태를 잘 살필 것을 당부하며 다음 외래 때 약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탈고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 좋긴 하지만, ‘휴가갑니다’의 내용 상, 남편의 사건을 되새김질 하며 재경험하다보면 공황발작이 올 수 있으니 가급적 사람이 많은 카페 같은 곳에 가서 쓰길 권장했다. 또한, 밤에는 글을 쓰지 말 것. 작가들에게는 감정이 올라오는 시간이라 선호하는 시간대이긴 하지만 환자에게는 유익한 시간이 아니라고 한다.
점심부터 다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나의 이 모든 증상이 '말짱'해졌다.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좌절했다. 이런 증상이 어떻게 정신과약으로 조절이 되는 거지? 그리고 또 깨닫는다.
"아, 나 환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