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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랑 Jun 13. 2024

하느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이전, 등에 지워진 십자가를 가볍게 해달라는 까다로운 주문에도 실력 좋은 타투이스트는 하늘하늘 날아갈 것 같은 아이리스를 그려주었다. 아주 날아가 버리기 전에 리터치를 해서 확실히 새겨버려야겠다. 타투를 받는 동안 공황발작까지 발생했으면 겁을 낼 만도 한데 인간이란 모름지기 망각의 동물. 남에게 발작하는 걸 보여가며 받아냈던 타투니 애착이 어마어마해졌다는 의미까지 부여해가며 기차표를 예매하는 나는,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타투할 당시, 타투의 크기에 비해 시술 시간이 모자랐고, 공황발작 때문에 선명한 타투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돈 값하는 타투를 완성하겠다고 다짐했다. 타투샵의 입구에 서서 신경안정제를 두 배로 털어 넣는 것 으로 그 다짐이 굳건해 지련지는 모르겠지만. 이 약은 일명 우황청심환 같은 효과를 나타내니 공황발작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었다. 그동안 약도 잘 먹었고, 밥도 잘 먹었으며 잠도 잘 잤다. 운동도 꾸준히 했다.     


 -10분 뒤.              

 

    온몸에 땀이 물 흐르듯이 흐른다. 최대한 타투이스트의 눈에 덜 띄게 하려고 손 등을 타고 손끝에 떨어지는 땀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을 계속 비볐다. 하지만, 등에서 나는 땀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도 땀이 많이 나서 물감이 피부에 스며들지 않는다.          


"좀 쉬었다가 할까요?"

"아, 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눈앞이 하얘지며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또 다. 또 공황이 왔다. 이렇게까지 약을 털어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공황이 왔다.


    겨우 등짝에 그림 하나 그리는 것일 뿐인데, 그저 내 마음을 괴롭히는 수술 자욱하나 가리 우고 덮어보겠다는데.

    더 이상의 만행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세포 하나하나가 땀샘에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친다. 제발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단 말이다. 난 환자가 되면 안된단 말이다. 내가 날 환자라고 인정하면 안 된단 말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나 갈 길이 먼데… 등에 짊어진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내가 환자가 되어버리면 이 모든 건 어떻게 하라고…

    거짓말.

    제발 누가 말해달라.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나의 전 직업은 음악강사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대상으로 음악 수업을 하거나 악기 연주 방법을 가르쳤다. 내가 말하긴 뭣 하지만 꽤나 음악적 재능이 있는 데다가 쉽게 가르치는 것에 특화된 사람인지라 나름의 유명세가 있는 편이었다. 그 유명세는 내가 암 투병 중임을 버젓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부탁할 정도라고나 할까.          


"선생님. 세달만 부탁드릴게요."          


    투병중인 간병녀는 직업에 얽매이기 어렵다. 시간의 제약을 쉽게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은 언제 어떻게 오실지 모르니 늘 깨어 기도 해야 한다.'라는 성경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사는지라, 나에게 온 기회는 굳이 막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한창 '나는 환자야'라는 우울의 연주곡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과 딸을 등에 짊어진 암 환자가, 그것도 백수가. 앞으로 어떻게 부양해가며 살아내야 할지 끝나지 않는 우울의 굴레에서 도돌이표를 찍어대고 있었다. 뼈 전이가 있는 암 환자이니 Largo를 열댓번은 더 휘갈겼더니 늪 같은 곡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이 곡을 멈춰줬으면 했는데, 염치를 불구한 이 전화가 우울의 마지막 악장을 그리며 나를 살렸다.     


'일단 돈을 벌자'          


    이 3개월간의 수업은 또 다른 수업을 연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딸의 학원비가 될 이번 수업의 대상은 자폐 혹은 지적장애인들이었고, 수업할 악기는 8현 가야금이었다. 일반인에게도 가르치기 어려운 ‘가야금’이라니. 가혹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르치는 것’에 특화된 사람인지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지적장애인 친구들은 초중증이 아닌 이상, 일반인과 구분하기 어렵다. 마치 남편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왜 ‘지적’장애인이라고 불리는가. 지능의 지수가 평균적인 수준보다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 지능의 지수는 일반적인 지능검사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인 지능검사는 일반적으로 약속된 언어/숫자/명사/계산 등에 의해 질답이 이루어지기에 지능의 지수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인의 ‘일반적’인 것과 지적장애인의 ‘일반적’인 것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약속’에 의한 것이다. 명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약속’이 그들과 되어있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힘들어진다. 악보를 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일반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면 달라지는 말이겠지만, 만약 그런 ‘약속’이 되어있지 않다면 새로운 ‘약속’을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이라는 단어는 붉은빛을 띄는 색을 빨간색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단어다. 하지만 그 약속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들이 어떤 명칭으로 약속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나의 36살 지적장애를 가진 제자는 ‘빨간색’을 ‘딸기색’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 수업에서 ‘빨간색’을 ‘딸기색’이라고 바꿔 불렀고, ‘딸기색’과 ‘블루베리색’, ‘바나나색’, ‘오이색’ 등의 약속을 이용해 음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3개월의 수업 끝에 ‘반짝반짝 작은별’을 두 팀으로 나누어 화음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수업 때는 사회복지사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각자 곡에 맞춰 팀을 나누고, 연주와 감상을 했다. 모두들 온전한 곡을 연주해낸 상황을 놀라워하고 즐거워했다.     


    이렇게 보니 그들은 그저 순수한 일반인에 불과해 보인다. 내가 그들 사이에 섞여 있으니 그들과 같은 지적장애인 같아 보인다. 바꿔 말하면, ‘나는 불행한 간병인’, ‘나는 유방암 환자’라고 이름표를 단 채, 스스로 어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선생님. 예뻐요. 내일 또 봐요.”              

 

    내일은 주말이라 수업이 없다. 게다가 정해진 세달의 수업 계약이 끝나 이 친구와 나는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가 나에게 건넨 그 말은 정말로 내일 보자는 말이 아니라 내가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건넨 수줍은 표현이다.     


    나 역시 이 수업이 마음에 들었다. 세달이라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해 줘서. ‘선생’으로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어서. 그리고 ‘내일’이라는 희망을 주어서.     


“고마워. 내일 또 보자.”.          




    암 환자로 등록이 되면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는다. 유방암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검사가 있는데 바로 ‘초음파검사’다. 일반적으로 초음파라고 하면 차가운 젤을 바르고 기계로 문질문질하며 시커먼 화면을 보는 장면을 생각할 텐데 어마무시한 초음파 장비가 있다. 바로 '유방 3차원 초음파 검사장비' 되시겠다. 가슴을 가운데 둔 채 판 두 개를 거의 겹쳐 조직을 검사하고, 상당히 높은 정확률을 자랑한다. 가슴을 짜부 시키긴 하지만 그렇게 아프지 않다. 그저 작은 가슴이 소멸할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뿐. 하지만 수술을 한 뒤 근육과 조직이 유착된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으아아악 살이이이이!!!! 찢어질 것 같은데요오오옥!!!."     

"안찢어져요. 금방 끝낼게요."               


    정말 살이 찢어질 것 같다. 아니, 그냥 찢어버렸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막론하고 질러대는 나의 비명은 의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초음파를 찍어댄다. 그러나 갑자기 특정 부분에서 움직임을 멈추어 좀 더 많은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아직 뼈 전이에 대한 부분도 확답이 나온 상태가 아닌지라 괜히 어디가 안 좋아서 사진을 더 찍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의젓한 척하지만 나도 암이 무섭다.      


    이렇게 검사를 하고 나면 결과를 듣기 위해 일주일 뒤 병원을 또 방문한다. 정말 귀찮으리만치 자주 가게 되는 병원이지만, 병원을 가까이 해야 혹시라도 모를 재발과 전이를 빨리 발견할 수 있다. 불평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입술을 툭툭 쳐서 집어넣는다.        

   

"초음파 결과에서... 동그란 게 있긴 한데... 수술 자국 같고 암일 가능성은 없네요."     

'다행이다'            

   

    요 작은 동그라미 녀석 때문이었다. 초음파를 찍던 의사의 돌발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니 긴장이 풀렸다. 암 환자는 스트레스 관리가 제일 중요한데 어쩌면 정기 검사를 하느라 마음이 쫄깃해져 스트레스가 더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유방암 환자의 스트레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타목시펜'이다. 호르몬성 유방암 환자는 암의 먹이가 되는 호르몬을 차단하기 위해 타목시펜과 루프린 주사(혹은 졸라덱스)를 먹고 맞는 호르몬 치료를 한다. 이로써 강제 갱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나는 매달 마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거의 날아갈 듯 기뻤다. 매달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휩싸이는 1인인지라 10년 동안 처방이 예약되어있는 타목시펜의 복용 기간 동안 그야말로 '프리덤'인 것이다. 물론, 모든 약이 그렇듯이 부작용도 있다. 부작용은 갱년기 증상과 자궁내막암이다.           

         

    타목시펜의 복용 기간 동안 자궁내막이 두꺼워지지 않는지 확인하고, 두꺼워졌다면 소파술을 하기도 한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타목시펜을 복용하면 유방암을 막을 수 있지만 자궁내막암을 걱정해야 한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유방암을 막을 수 있는 절대권력자인 타목시펜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자궁벽도 깨끗하고, 물혹도 없네요"     

"저, 예전에 물혹 있었지 않았어요?"     

"어? 그렇네요? 없어졌네?"         

           

    호르몬이 차단되어서 그런지, 예전에 있었던 물혹이 사라졌다. 이걸 '럭키'라고 해야 하나? 좋은 건 좋은 거다. 암의 기원이 될 수 있는 물혹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암 환자 같지 않게 얼굴색이 좋네요. 오래 사실 것 같아요."      

                   

    암환자에게 오래살 것 같다는 게 덕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깔깔 웃었다. 나쁜 생각은 해서 뭐하랴. 어쨌든 내게 위로하기 위한 산부인과 의사의 농이라 생각하니 별것 아닌 재밌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그 외, 갱년기 증상과 흡사한 불면, 우울, 체중증가, 발한, 등등.... 타목시펜의 부작용도 참아내면 적응이 되는 건지 부작용이 줄어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만 해 진다. 하지만 홧홧하며 더웠다 추웠다 하는 증상은 참으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타목시펜 때문에 열감이 너무 올라와요.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해요?"          

"사실 그것 때문에 일상이 불편하다고 하면 약을 끊어보고 지켜 봐야겠죠.... 끊어야겠어요?"    

"아니 뭐, 끊을 정도로 불편하진 않구요."                 

        

    호르몬 양성의 유방암은 타목시펜을 복용하는 편이 훨씬 이롭다. 물론 부작용이 일상을 파괴할 정도라면 고려해봐야겠지만, 암이 전이되는 것보다 일상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항암도 안 하고 도망간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긴 하지만.




    남편은 내가 10살의 나이에 성당에서 만났다. 각자의 집에 숟가락과 그릇이 몇 개가 있는지, 옷이 몇 벌 있는지, 서로의 학교와 친구가 누군지, 취미가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일 무엇을 할 것인지, 영혼의 숨소리까지. 모두 다 안다.     


    남편의 사고 이후, 남편과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행복하기만 해야 하는 남편이 자신의 상태조차 모른 채 기억하지 못하는 매일을 살고, 그런 남편을 보고 살아야 하는 나의 현실이 가혹했다. 나 홀로 썩은 동아줄을 붙잡으며 안간힘을 쓰고 울어댔다. 술을 마시고 찢어지는 마음을 견디다가 중환자실에서 허락된 30분간의 면회를 고스란히 기록했다. 그렇게 기록한 매일은 ‘휴가갑니다(남편간병일지)'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인터넷 카페에 게재했다. 그러자 남편만이 전부였던 내 세상에 변화가 일었다.       

             

-카톡       

'검사 결과는 어때? 괜찮다고 하지?'                         

-카톡     

'잘 다녀왔어? 남편은 잘 지낼 테니 걱정말고 이제 니 몸 챙겨. 피곤할 텐데 달달한 거 한잔해~'                    


    남편을 통해 열린 세상은 언젠가부터 내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 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했을 뿐. 내가 누군가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 손을 내밀었듯이, 누군가가 나를 잡아주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따스함이란, 알아채기 시작하면 끝없이 밀려드는 것 이었다.    


"남편분께서 요양 하신지 2년이 지나 중증요양상태셔서 배우자분께서 그 대상이 되시기도 하시고, 심리상태가 많이 불안해 보이셔서 이걸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근로복지공단 직원은 조심스럽게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안했다.                

    산재환자는 평균 2년의 요양 기간이 지나면 회복하지 못하는 장해로 판단하고 남은 후유증은 등급을 매겨 종결하게 된다. 하지만, 남편은 2년이 지난 후에도 종결하지 못하고 계속 치료하고 있다. 이런 환자들은 '중증요양상태'로 전환되어 요양이 이어지게 되는데, 피재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도 긴 요양 기간에 지쳐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지게 된다. 이를 위해 산재보험은 심리상담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공단 직원은 일전 공단 바닥에 퍼질러 앉아 펑펑 울며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젊은 여자를 안타깝게 여겨주었는지 이것저것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황발작을 가라앉히는 정신과 약만 복용 중인 채, 이에 대해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아니, 나의 정신적인 상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시간조차 없었다. 걱정만 해줘도 감지덕지였는데 방법을 알아보고, 찾아주기까지 했다니!          

           

    직원은 다차원 심리 검사지를 작성한 후, 결과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에서 최대 10회에 걸쳐 금액 지원을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정신과 약은 증상의 경감을 도와주는 것뿐이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은 사실, 내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대화를 통한 상담 치료인 것이고, 이를 통해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를 수 있게 된다. 운이 좋으면 그토록 싫어하는 정신과 약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직원의 따스함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뼈 전이 아니고, 골절이 맞는 것 같네요"     

"와....."                    


    경과 관찰을 한 지 3개월. 드디어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아냈다. 그토록 기다렸던 답변이었건만, 너무 기다려서 그런지 감탄사 말고는 적당한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 결국, 뼈 전이는 의사의 오진이었다. 덜컥 겁을 내고 조직검사를 한다고 등을 쨌으면 수술 자국만 더 새겼을 것이다.      


    그 길로 신경외과에서 유방 외과로 달려가 교수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교수는 미안한 기색을 한껏 내비쳤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내가 뼈 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니까. 본 스캔 영상보다, MRI 판독 결과지보다 나의 직감에 의지해 띄워봤던 '딜'이 들어맞은 것 보면 아직 의학은 인간보다 한참 멀었다.                  


             

    뼈 전이의 경과 관찰을 위해 주어졌던 3개월은 혼돈과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하느님이 누군가의 모습으로 내게 손을 내민 시간이기도, 그것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지적장애인 친구들의 모습으로 나를 우울에서 꺼내주었고, 또 얼마 전에는 산부인과 의사의 모습으로 농을 해주어 기분을 전환시켜 주었다. 또 얼마 전에는 근로복지공단 직원의 모습으로 공황을 치료할 방법을 모색해주었고, 이번에는 신경외과 교수의 모습으로 와서 뼈 전이가 아니라고 진단을 내려주었다.     


    그랬다.

    어떤 역경이 불어와도 쓰러져 울지언정 뿌리뽑히지 않았다.

    어둠에 처박히었을지언정 기어코 기어 나왔다.

    목이 메었을지언정 나오지 않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그러자 끝끝내 문은 열렸다.      


   인간은 운명의 굴레를 살아내야 한다. 신은 그 고통을 기꺼이 함께 하고, 그것을 믿는 나에게 두드릴 힘을 주었다. 게다가 쓰러지지 않도록 다른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다. 그분이 주신 힘은 영원이 넘치어 힘껏 두드리게 한다. 그것은 분명 이 고통의 굴레를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당신들에게 그러한 삶의 의미를 전하려 이 회고록을 쓴다. 그것이 내 소명이라 여긴다.


"하느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앞으로도 문이 부서져라 두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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