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 직원이 제안해주었던 심리상담의 적격여부를 위해 다차원심리검사 문항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몇 일 지나지 않아 심리상담 대상이 되었으니 공단과 연계되어있는 센터로 방문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의 정신상태라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말자. 이 상황을 해결 할 수 있다면 똥을 먹는 일이라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심리상담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시간을 상담받기로 했다. 나도 나름 누군가의 마음을 들으며 상담을 한 사람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남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면서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오류를 범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쨌던 심리상담치료란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어야 그 효과가 배가 된다는 사실은 잘 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심산으로 상담에 임했다.
"그런데... 상당히 힘든 상황인데 왜 얼굴이 그렇게 밝아요?"
"글쎄요. 하하 다들 제 얼굴이 밝다고 하시더라구요."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상당히 무리가 있는 거예요.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말을 하잖아요?"
사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이중 삼중으로 꽁꽁 싸서 메어 둔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꼼지락거리며 푸는 모습을 보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유추해 내는 사람들이 심리상담사다. 하지만, 나는 보자기로 싸 둔 것을 꺼내어 두고 풀지도 않은 채 안에 들어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요망한 토끼는 애초부터 용왕에게 간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를 보여주기 위해 저 보자기 끈을 당기는 것조차 두렵다. 저 끈을 당겨 풀어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을 알기에, 절대로 풀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랗게 덮쳐와 일상을 파괴하는지, 나를 얼마나 무너뜨릴지, 얼마나 슬프고 괴로울지 아니까. 그래서 풀지 않는다. 풀지 않고도 숨겨져 있는 것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 방법이 바로 웃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상대방도 이 순간을 편하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심리상담사는 이렇게 토끼를 뭍으로 내어줄 용왕이 아니었다.
심리상담사는 내가 감정을 꺼내는 것에 대해 겁을 내고 있으니 '나'와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깨우치는 것을 이 상담의 숙제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명상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도 명상은 해봤다. 그렇지만 물론 실패했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알려주는 명상은 뭔가 다른 건가?’ 하고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두 번의 상담 후, 대략적인 나의 성격과 상황을 알게 된 상담사는 따로 마련된 명상의 방으로 안내했다. 편안한 조명과 작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 안내에 따라 한쪽에 위치한 빈백에 편안히 몸을 뉘었더니 따뜻한 담요를 둘러주었다. 싱잉볼을 두드리자 공기가 퍼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상담사는 나에게 명상을 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를 건네며 나를 더 깊고 깊은 곳으로 끌여 들었다. 그 끌림을 거부하지 않고, 따라갔다. 그래야 치료될 수 있다. 상담 치료는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내가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곳을 찾아봅니다."
상담사의 말대로 마음속의 가장 편안한 곳을 찾아갔다. 이내 떠오른 그곳은 6살 때부터 살았던 산동네였다. 아빠의 사업이 실패하고 열 번 넘게 이사를 다니 다가 겨우 정착한 곳. 하지만 내 인생에서는 가장 걱정이 없었고, 가장 사랑받았으며 가장 행복했던 곳이었다.
"내가 힘들 때, 다시 돌아오는 곳은 이곳입니다."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지금껏 나는 힘들지 않다고, 괜찮다고 하며 구태여 편안하길 거부했다. 편안해지면 게을러지거나 나태해질까 부단히도 채찍질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힘들면 이곳을 찾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곳으로 찾아오면 좀 더 여유로워지고, 옥죄었던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심리상담은 나에게 딱 맞는 치료법인 것 같다. 한껏 편안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딸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 다시 한번 명상을 시도하려 침대에 누웠다. 또 그곳으로 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나는 너무 힘들어서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은 게 아닐까. 음... 이게 바로 중독의 초기증상 아닐까.
편안한 침대에 누워있어서 그런 건지, 잠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편안한 장소로 가려고 노력했고, 키만큼 높이 자란 풀숲을 헤치며 다시 다다랐다. 그곳에는 어떤 폭풍이 와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큰 나무가 서 있었고 그곳에... 남편이 서 있었다.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나는, 남편을 내 안에 그렇게 세워두었던 것이었다. 나의 37년에 남편과 함께한 20년을 제외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기까지 내 곁에는 남편이 있었고, 남편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나는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남편이 사라지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 정의하면서, 그 어떤 모습으로라도 남편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도 원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무 밑의 남편은 활짝 웃었다.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세워둔 당신을 이제는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것이 내가 홀로 설 수 있게 하는 발판이라는 것을. 그렇게 생각만 잠시 하고 눈을 감았다 떴는데 남편은 훌쩍 사라져버렸다.
나는 울었다. 그저 울었다. 보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나는 보내줄 수 없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딸이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저 울었다.
이 마법같은 체험을 심리상담사에게 전하니, 부모님과 생성하지 못한 애착 관계가 남편과 이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각자가 독립상태로 떨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이면서.
이후에도 명상을 위해 눈을 감은 채 편안한 장소에 가면 남편이 있었고, 훌쩍 사라졌으며 이내 울었다. 나는 명상을 더 열심히 했다. 명상을 하면 다치기 전의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나 선명하게 예전의 남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좀 미쳐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때의 당신. 지금도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당신.
나는, 평생동안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이별을 매일 경험해내며 내 안의 남편과 헤어지길 반복했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남편과 정말로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헤어져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함께한 추억과 이별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그와 내가 사랑했던 20년을, 그 시간들이 쌓여 이루어진 나를.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다. 내일이 되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하며 대했던 그동안의 역경과는 또 다른 성격의 일이었다. 생살을 도려내고 아물 새도 없이 다음날이 되면 또다시 생살을 도려내야 했다.
대체, 이게 뭘까.
이 고통은, 대체 뭘까.
남편의 사건을 의뢰한 법률사무소의 대표변호사는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를 아내로 두었다. 배려심 깊은 변호사는 공연을 관람하며 기분을 전환하길 권했고, 흔쾌히 딸과 함께 리사이틀에 참석했다. 남편과 나는 '음악'이라는 취미가 공통분모라 이렇게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 성격은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취미가 잘 맞아 이곳저곳 쏘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젠 더 이상 함께 공연을 보고, 분석하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사실에 또 눈물이 차오른다.
다행히 이내 어둑해지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내가 여태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와는 뭔가 판이 하게 다른 소리였다. 첼로처럼 무겁기도 하고, 피콜로처럼 높은 소리가 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바이올린 소리는 마음을 정말 미친 듯이 헤집었고, 그 앞에는 내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 바이올린 리사이틀이 뭐라고, 눈앞의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대체 뭐하는 사람 이길래 저 여린 어깨가 새빨개지도록 바이올린을 부여잡고 온몸으로 곡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 선율에 맞춰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고, 내 눈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 이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제대로 마주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아빠가 암으로 죽고, 동생도 암에 걸려 투병하다 죽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서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입을 닫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하려 했지만 나를 안타깝게 여긴 후원자가 대학을 보내줬다. 그래서 그걸 갚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남은 학기를 졸업했다. 당시 남자친구던 남편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돈을 벌러 떠난다길래 원룸 보증금 300만원과 휴대폰만 달랑 들고 따라나섰다. 당연스레 남편과 결혼했고, 좋은 가정을 꾸렸다. 남편의 사고 이후, 잠을 아껴가며 밤낮으로 공부했고, 그 지식과 정보를 다른 이에게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며 마음을 나눴다. 그 열심한 끝에는 암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많은 선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 선택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누군가가 우려했을 일들이라도, 혹여 무리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잘 해왔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결국, 남편과 함께 만들어온 모든 것은 나라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완성된 ‘획’이었다. 남편 없이 완성할 수 없었겠지만, 내가 없이 완성될 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남편이 없더라도 완성했을 것들이다. 이 간단한 당연함을 이제서야 알아채다니.
그렇다고 내가 만든 인생을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암이라는 녀석 때문에 인생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뿐이고,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고, 참 잘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암이 생겼다고 환자 코스프레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어차피 쉼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니 무리해서 쉬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저 나일 뿐.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지금까지 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
내 인생에 암이 찾아온 이유는 나에게 더 큰 절망을 안기기 위한 신의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나에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기 위한 강제적인 휴가였던 것이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한 주마등의 끝에는 또다른 내가 서 있었다.
"잘 해와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남편을 간병하면서 담은 이야기를 엮어 출간하기로 했다. 관찰일지처럼 나열했던 글들을 읽을만하게 탈고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꽤나 고된 일이었다. 특히 내 글에는 작가로서의 '쪼'가 상당히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먼저', '여튼', 이렇게 임상적으로 단정 짓는 단어가 정말, 엄청나게 많다. 남편의 상태가 시시각각 바뀌었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 없는 사실이 있었기도 했지만, '경우의 수'를 몇 가지나 마련해 두는 내 성격상으로도 그러한 것 같다. 혹시나 '휴가갑니다'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면, 이 '쪼'가 얼마나 자주 거론되는지 세어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재미있어질 것 같다.
남편의 간병일지는 천일이 넘어가도록 기록했지만 약 900일로 끊어 출간할 예정에 있다. 900일로 끊은 이유는 내 유방암 진단일을 기점으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휴가갑니다'는 남편의 휴가가 주제이고, 지금 브런치에 연재하는 '유방암에 걸린 간병녀'는 나의 휴가가 주제가 된다.
'휴가갑니다'의 출간은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운영하는 지역출판사에서 하기로 했다. 비록 대형출판사에 비해 홍보가 되지 않거나 묻힐지 몰라도, 지역출판의 명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사업가의 열정에 손을 보태기로 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대단한 작가도 아니지만 첫 출판을 지역출판사에 쉬이 허락하는 나름 통큰 작가다.
'휴가갑니다'가 부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졌으면 좋겠다. 내가 숱한 역경에도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버틴채 긍정과 희망으로 써내려간 진심이 누군가에게 닿길 바란다.
10회의 심리상담을 통해 내면의 나와 마주하고, 대화하며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특히, 남편과 함께 이루어진 나도 '나'라는 것. 그러니 그와 함께 이루어진 인생을 떼어두고 새롭게 시작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나는, 남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소하랑'이라는 부캐로 영원히 남편과 함께하려 한다.
유방암에 걸린 간병녀, 소하랑.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