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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랑 Jul 04. 2024

나의 시간, 그리고 당신의 시간

    새해를 맞아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그렇다고 환자를 데리고 머나먼 해외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딸은 놀러가길 원하는데 이 계획을 세우는 사람 역시 환자다. 환자는 ‘환자에, 환자에 의한, 환자를 위한‘ 여행지로 온천을 결정했다. 온천에는 가족 단위의 여행객을 위해 거대한 가족탕을 마련한 객실이 있고,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온천수를 펑펑 쓸 수 있다. 게다가 암환자는 체온을 올리는 것이 좋은 치료법이기도 한데다가 딸은 수영을 좋아하니 이 얼마나 합리적인 선택인지.


    물론, 목적지까지 가는 1시간 30분동안 남편의 발광(?)으로 힘겨웠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차만 타면 남편은 제어력을 잃는 일이 빈번하다. 딸과 나는 고막에서 피가 날 것 같은 괴로움을 이겨내고 도착하자마자 수영장급의 욕조에 감탄하며 물을 받았고, 모두가 한 탕에 들어가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즐겁다. 그렇다. 지금의 이 즐거움만 생각하면 된다. 지나가버린 시간의 괴로움을 굳이 곱씹지 않아도 된다. 신나게 놀다보면 금새 뇌의 활동이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고 남편은 아무말 대잔치를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닥치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대책을 마련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너무 고뇌하고 힘겨워하지 말자.


     예상한대로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편은 정신을 놓기 시작했고, 얼른 남편을 닦여 옷을 입힌 후 재웠다. 그리고 딸과 조금 더 물놀이를 즐긴 후 컵라면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아, 이렇게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것만으로도 나와 주위가 힘겨워하지 않는구나. 남편과 실랑이 하지 않음으로 인해 딸과 더 좋은 시간은 나눌 수 있구나. '



    이 여행으로 나는 그동안 남편과 함께한 시간들을 정리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니, 정리라기보다 나는 나의 시간을, 남편은 남편의 시간을 살아낼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남편은 2019년 7월 30일 산재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수 많은 사형선고를 이겨내고 나의 곁에 머물러 주었다. 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소중해서, 어떻게든 남편과 '함께' 살아가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2년 뒤, 나는 유방암에 걸린 채, 책임감과 삶을 등에 짊어지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남편의 2번째 인생. 그리고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시간들. 그리고 나에게도 오래 남지 않은 시간들. 이 신의 장난같은 인생을 어찌해야할 지 알 수 없어 지금까지 이렇게 글을 썼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다. 그렇게 몇 년을 풀어냈던 문제의 답은 나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은 누군가의 기준이 아닌 나에게 옳은것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남편은 뇌의 손상으로 시시때때로 성격이 변하고, 20살 이후의 기억은 거의 잃어버린데다, 새로운 기억은 아예 입력되지 않는다. 남편도 이 상황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다보니 내게 욕설과 폭력을 일삼기 일수였고 몇년동안 '시발년'을 듣다 보니 '내가 시발년이 맞긴 한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 상황을 좀 더 버텨내지 못하는 내게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행동들은 모두 뇌를 다쳐서 온 무언가일뿐, 나는 도를 넘어서 효자손이나, 주먹이나, 칼까지 들게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더 인식해야 했다. 어쩌면 내가 암으로 죽는 것보다 남편의 공격성에 휘둘려 죽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남편의 공격성은 뇌를 다쳐서 온 것이 당연하지만, 나와 딸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남편을 위해 살아온 모든 날들이 다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편이 쌍욕을 하며 나를 때리다가도 이내 '내가 잘못했어'라며 울음섞인 얼굴로 고하면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상관없지 않은가' 하고 무너져 내렸던 때도 있긴 했지만, 나의 이 삶을 영원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러한 나의 '선택'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남편이 나를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아 너무 슬펐다. 그래서 함께 살을 부대끼고 살아가면 좀 더 달라질 것이라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결국, 지금까지의 괴로움은 내 마음에 있는 미련 때문에 택했던 '선택'이 나와, 딸과, 친정엄마와, 남편까지 힘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주어진 인지장애, 시각장애, 만기신부전, 당뇨, 갑상선저하증들은 나아지는 병들이 아니라 나빠지지 않도록 해야하는 병들이다. 나의 유방암 역시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 전이나 재발을 걱정해야하는 질병이다. 그러니 희망고문에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조금 더 오래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지 아닐까?


    그리하여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남편의 행동장애를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어렵사리 내린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공격성을 대항하기 어려워서, 치료할 상병이 너무 많아서 병원들은 한사코 남편을 거부한다. 이해는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우리남편같은 환자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남편의 사고 초창기, 과도한 공격성으로 인해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시켜야 겠다는 말에 펄쩍 뛰며 자발적 간병의 길을 걸은 나였지만 결국 폐쇄병동이 있는 정신병원을 두드리게 되었다. 선택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갈 수 있는 병원은 정신병원 뿐이었고, 그마저도 수많은 거절을 거쳐서야 남편을 받아주겠다는 산재지정병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입원을 위해 찾아간 정신병원은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여기서 친구라도 사귀며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힘겨워 하는 나와 딸을 보지 못할테니 괜찮지 않을까', '입원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어떻게 해야할까'하며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의외로 남편은 즉답했다.


"치료 잘 받고 갈게."


    남편은 뭔가 알고서 이러는걸까. 정말 상황파악을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걸까. 남편의 공격성을 제어할 방법은 생각을 누르는 약물치료 뿐이다. 뇌가 이미 손상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한다는 개념보다 누른다는 개념이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 치료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치료 잘 받고 갈게'라고 쉽사리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꼭 쥔다. 남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가 맞는걸까. 하지만 나의 염려가 무색하게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료진과 웃으며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4년동안 멈추었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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