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카렌블랙센의 소설 '아웃오브아프리카'라는 제목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책의 역자 해설에서 읽다.
내 의식 속에 가장 먼 낯선 땅이었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여행의 마지막 대륙으로 남겨뒀다.
둘이 치러야 하는 거액의 비용도 부담스럽고, 황열병이니 말라리아니 안전이니 열악한 환경이니, 남미를 떠날 때와 비슷한 염려들이 없진 않았으나, 여행사를 통해 23일간 세미패키지 형식으로 다니는 것이니 너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떠나자고 지른다.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함께 하는 사람들과, 여러 동물들과, 더 많은 생명들과, 광활한 대자연과 나 사이에 무슨 새로운 것이 생겨날까. 설렘과 기대, 떨림과 긴장이 만만찮다.
케냐, 탄자니아, 짐바브웨, 잠비아, 보츠와나, 나미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번 여행기는 가능하면 여행 중에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저녁에 곯아떨어지는 여정이라 쉽지 않겠지만 틈틈이, 생생하게 기록해 보자.
세계 여행의 마지막 정점, 세계 여행기의 에필로그는, 아프리카처럼 새롭게!
2025. 2. 23 인천공항 - 아디스아바바- 케냐 나이로비
새벽 12시 5분 인천공항을 날아올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까지 13시간여, 3시간 지나 환승하여 2시간 반여를 다시 날아왔으니 여기 나이로비 오기까지 얼마나 걸린 걸까?
환승지 아디스아바바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울 엄마 표현대로 비행기 안에서 '몸살대살'을 하고 왔으니까. 그래도 시간을 보니 조금이라도 잠을 잔 것 같아 안심이었다.
도착지 나이로비에 발을 딛는 순간, '아, 여행의 반이 지난 것 같아'라는 생각도 '안심'에서 오는 마음일 게다. 긴장 많이 했음이 틀림없다.
아디스아바바라니, 케냐라니, 나이로비라니, 킬리만자로라니, 사파리라니... 참 복된 삶이다.
이렇게 생이 마감된다 해도 아쉬움은 없지, 감사하지, 그러나 지금 생이 마감된다면 조금 아쉬움은 있겠지... 그냥 이런 생각이 난다.
케냐공항에서는 일회용 비닐봉지 하나만 발견되어도 벌금 4만 달러라고 허걱이게 겁을 주는 통에 면세점에서 산 볶음김치 싼 봉투도 버리고 지퍼백에 넣느라 고생했는데, 아무 검사 없이 통과.
저녁 먹으러 숙소에서 약 20여분 달리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을 보다.
특히 젊은이들이 한없이 도로 주변을 걷고 있다. 쓰러질 듯한 판자나 천으로 칸막이를 만든 시장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는데 거기에 어찌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원활하지 않은 전기 때문일 듯 거리는 어둡고 차들과 오토바이와 사람이 마구 섞여 있어 심히 번잡하다. 우리나라 60년대 초쯤이 이러지 않았을까, 살기 위해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고 있는 걸까. 여기서도 눈치 빠른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몸 바쳐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배우거나 해서 위로 올라갈 것이고 경쟁을 할 수도 없거나 낙오된 자들은 더 어려워질 것이고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질 것이란 느낌이다. 케냐는 아프리카에서도 그나마 나은 편이라는데, 넓은 땅과 자원을 두고도, 대부분 식민지였던 이 나라들이 최절정의 자본주의의 시대에 많이 어려워 보인다.
'동물의 왕국'에서 상상하는 '강자생존'의 모습이 아니라 '공존'의 삶으로 갈 수 있을까. 버스를 타고 가면서 여행자의 눈으로 보는 풍경 앞에 내가 저기에 끼어 개인적으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싶게 많은 것이 어둡고 검다. 그것이 무섭다거나 어색하지는 않은데 선뜻 끼어들 수는 없는 이방인의 눈이다.
어느 경계를 넘어가면서 불이 좀 더 밝아지고 번잡의 경지는 정리되고 도로도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더니 만찬을 먹는 호텔로 들어섰을 때는 확연히 달라졌다. 잘 다듬어진 너른 정원들은 지금껏 달려왔던 곳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나이바샤 호수 보트 사파리와 크레센트섬 워킹 사파리
하루치의 짐을 싸들고 숙소에서 두 시간여 달려온 곳이 ‘나이바샤 호수’ 근처에 있는 롯지다.
저기 앞에 호수가 펼쳐지고 정원 겸 공원인 이곳에는 얼룩말과 이런저런 동물들이 거짓말처럼 바로 앞에서 걸어 다니고 있다.
황량하고 먼지 날리는 도로를 달려올 때, 마른 염소나 양들이 마른 나무들과 함께 어렵게 서 있거나 풀을 뜯고 있는 걸 보았는데 여기 동물들은 완전 우아한 세상을 사는 듯하다.
'사파리'는 여행이라는 말이라고, 여기서는 동물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사파리라 한단다.
보트를 타고 호수를 달리면서 물가에 사는 동물들을 찾아 나선다.
아프리카 독수리는 공중으로 던진 고기를 건져 먹으려 빠르게 비행하며 낚아챈다. 징그럽게 큰 펠리컨 역시 생선을 먹으려 달려든다. 저쪽에서 하마가 물을 올라와 어슬렁 거리며 사람이 던지는 먹이를 받아먹으려 입을 벌리는데, 그들이 그리 큰 몸뚱이를 가진 줄 몰랐다. 게으른 건지 이미 배가 부른 건지 물속에 잠겨있던 많은 동료들이 혼자 먹이를 받아먹고 있는 동료가 좋아 보였는지 하나 둘 기어 나오는데 그 덩치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참 뒤에 아기 하마까지 어기적 기어 나온다. 그런데 이 아기 하마, 어른 사람보다 커다란데 참으로 귀엽도다.
고목들이 호수 위에 박혀 있는 비현실적인 풍경의 호수를 돌다가 크레센트섬, 초승달 모양의 섬으로 들어간다.
영화 '아웃오브아프리카'를 찍은 장소이고 그때 섬에 들어간 동물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한다.
원숭이와 타조들, 톰슨가젤, 기린, 워터벅, 얼룩말, 누... 이런 동물들을 가까이서 멀리서 보다. 처음 저 멀리서 기린을 보았을 때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동물원에서 보던 느낌과는 질이 다르다. 아주 훤칠하고 훤칠한 그가 걷는 모습은 귀족이 관을 쓰고 최대한의 우아하고 우아하게 한 발씩 내딛는 것 같다.
동물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런 거 없는 내게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게는, 이 장면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인간에게 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은데 인간들은, 심지어 납작한 감성의 나조차도 동물 하나 나타나면 호들갑 떨며 극한 관심을 보인다.
사실 하늘이 더 멋지긴 하다. 마른 초원을 넘어 짙은 구름과 맞닿은 지평선 끝에 서 있는 몇 그루 나무들이 나를 흔든다. 이렇게 단순하고 고요한 풍경이 있을까. 아프리카의 초원이 이런 모습이구나.
케렌 뮤지엄
케렌이 살았던 집을 보존해 박물관을 만들었다.
이곳을 방문한다 하여 아웃오브아프리카 영화를 다시 보고 책을 사서 읽었다.
이 집 앞에서 케렌이 연인 데니스와 대화를 나누고 축음기를 틀어놓고 춤을 추던 장면을 기억한다.
영화는 정말 아름다웠다.
내 젊은 날 로버트레드포드를 사랑하게 된 것은 멋진 외모와 멋진 행동에 반한 것이 아니었을까. 수수하고 진실한 모습은 여전히 멋지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 다시 본 영화는 '이런 영화였나?' 완전 새로운 느낌이다.
그의 생각들에 반하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자 하는 일관된 삶이나, 아프리카라는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심이 드러나는 짧은 대화들,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 그러나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날아가는 마지막은 새롭게 깨달은 감동이다.
책과 영화는 많이 다르다.
영화에서는 둘 사이의 사랑이 주요한 내용이지만 사실 45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데니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분량 반을 넘긴 후이다. 대부분이 아프리카의 풍경과 부족들의 삶과 정서,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 우정들, 일화들이 담긴 책이다.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사람들을 알려준 이야기라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 그녀의 생가, 부엌, 커피기계, 거실, 화장실, 서적들, 의상들, 사냥의 포획물로 장식한 동물의 외피들...
케냐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흔적이 여기저기 있다. 케렌 거리, 박물관, 병원, 동네 이름...
케냐를 사랑하고 교육, 의료 등에 기여를 한 작가 케렌, 지금도 관광객을 모이게 하는 케렌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잔치를 벌였음직한 집 앞 커다란 정원엔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왔는지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내게 관심을 표하며 손을 마주치며 "잠보! (안녕!)" 인사하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이름을 물어보는데, 아이들이 떼로 카메라 앞으로 들어온다. 하나같이 빛나는 검은 얼굴에 팽팽하고 환한 아이들, 수줍게 자기 이름을 말하는 아이들, 꼭 말해야 하는 듯이 옆구리를 찌르며 조용히 말해주는 아이들, 완전 귀여움 짱이다.
"난 한국에서 온 한국어 선생님이야!" 나도 신나게 떠든다. 잘 크거라.
기린센터
유튜브에서 기린과 함께 걷고 먹이도 주고 하는 것을 봤는데, 여기서는 먹이만 주고 끝이다. 조그만 그릇에 풀을 압축해 놓은 먹이를 한 종지씩 받아서 기린이 혀를 내밀면 그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겁이 나서 못할 줄 알았는데 내 손에 올려놓으면 긴 혀로 그것을 핥아가는 것까지. 혀 색깔이 검다. 거칠거린다.
그런데 눈! 눈망울이 이렇게 생겼구나. 눈썹이 길고 귀여운 게 아이와 같다.
먹이 앞에서 무장해제 당한 듯한, 아무 생각 없는 어린 아이나 강아지 같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귀엽고 그 긴 혀도 귀엽고 먹는 모습도 귀엽다. 기린도 귀여워하다니.... 같이 워킹하면서 걸으면 참 좋으련. 관광지처럼 관광객처럼 되었다. 날이 뜨겁다.
밤에 킬리만자로와 세렝게티가 있는 탄자니아로 떠난다.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