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 달 1
새가 창밖 베란다에 날아와서 뭐라 뭐라 지지 짝짝 인사를 들이대면 의식이 깨어날 수밖에 없다. 눈을 뜨면 산방산이 커다랗게 창을 채운다. 그 앞 유채꽃밭에는 아마 산방산을 넘어온 해가 벌써부터 꽃들에게 반짝이며 인사를 했을 것이다. 맞아, 지금은 제주야.
아담한 거실로 나오면 통창엔 두 귀를 귀엽게 세운 바굼지오름이 제일 먼저 마중 나와 있다. 아주 의연하게. 아침 인사는 물론 해 넘어가는 저녁까지 늘 우리 거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저 오름에게 직접 알현하러 갔었지. 귀여운 두 귀인 듯했던 것은 만만치 않은 바위와 무성한 숲을 지닌 산봉우리였고, 너른 대정의 들판과 바다, 모슬봉, 산방산, 송악산,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까지 제주의 모든 풍경을 다 거느린 대단한 오름이었다는 것……. 놀라워라.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침 인사를 나눠야 할 이들이 많다. 일단 마늘과 양파들, 그들이 살고 있는 밭들에게. 임자가 다를 것이다. 나무와 유채꽃과 무꽃과 돌담으로 구불구불 구분 지어진 것은 밭 임자들이 따로 있다는 거다. 그리고 꿩들에게. 장끼 한 마리와 새끼인지 마누라 셋인지 작은 꿩 세 마리가 밭에서 이른 아침을 주워 먹고 있다. 장끼는 날개를 퍼덕거릴 때마다 ‘꿔엉꿔어억~’ 제법 큰 소리를 내는데, 그래서 이름이 꿩으로 되지 않았을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햇살에 따라 노란 나비 흰나비들이 밭들을 넘나들며 때로 우리 창 가까이 날아온다. 이렇게 많은 나비를 본 것은 처음이다. 매일 이런 나비들을 만난다. 내 몸이 덩달아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다.
마지막 안부를 묻는 것은 저기 큰길 건너편에서
말 하나 않고 서 있는 말! 늘 서 있다.
가끔 느긋하게 걷기도 하고 아주 가끔 펜스 안에서 뛰는 모습도 본다.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말은 잠도 서서 잔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무슨 인생이 그런가, 아니 무슨 ‘마생’이 그런가 묻고 싶다. 너는 왜 거기 그렇게 있니. 사람을 위한 관상용이니, 식이용이니, 펜션의 아이들을 위한 놀이용이니.
세상에는 수천만의 생물종이 있다는데, 그중 한 종일뿐인 인간이 너무 많은 종들을 고단하게 하고 있구나. 이걸 인위적이라고 하는가. 물론 이런 복잡한 심사는 아침에는 없다. 그냥 밤새 안녕인지 안부를 묻고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반가운 인사를 나눌 뿐이다.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은 평화이다.
도시 아파트에서 맞는 아침은 '나쁘지 않다'. 제주에서 맞는 아침은 '매우 좋다'.
모든 대상에게 살뜰한 인사를 나누고픈 아침이니 말이다.
걷고 먹고
하루 일정 중 '걷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제주의 속살을 본다. 바닷길, 마을길, 밭길, 산길, 오름길, 숲길, 곶자왈 엉클어진 돌길…….
내 몸과 마음은 함께 없어진다. 다 내려놓게 된다. 세상에 중요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이 길을 걷는 순간이 중요하고 혹은 ‘중요함’이란 것도 없고, 저기 놓인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햇살이 따가우면 따가운 대로 온몸으로 받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내 몸을 맡기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이 풍경들에 온전히 무장 해제된다.
제주에는 맛있는 것이 왜 그리 많을까. 아니 왜 다 맛있는 걸까. 보말수제비 갈칫국 전복죽 오분작뚝배기 흑돼지 돔베고기 돌문어돌솥밥 나물들 갈치조림 고등어구이 회국수 물회 그냥 회 해물라면 해물짬뽕 브런치 오메기떡 한라봉 천혜향 한라봉착즙주스 청보리막걸리 우도땅콩막걸리 제주백록담 위트에일 한라산 17…….
하루 신나게 진하게 걷고 나서 이런 것들을 하나씩 먹고 나면, 먹고 나니 허릿살이 다시 잡힌다마는, 할 수 없다. 집에 가면 소식하고 그러면 되리.
한 달 살이를 함께하는 손님들
제주살이 한 달을 예정한 것에서 절반은 우리 둘이, 절반은 제주에 오고 싶어 하는 지인들을 초대하여 같이 지내기로 한다.
누군가 이름 붙여줬다. "순쌤네 민박"!
첫 손님은 언니들과 형부들이다. 세 자매와 딸린 남편들 이렇게 여섯이 왁자지껄 다닌다. 5인승의 차는 좁지만 알뜰하게 다니기로.
동백동산, 사려니숲길, 가파도, 송악산 둘레길 이렇게 걷다. 어디든 탄성이고 어디든 감동이다. 모두들 얼굴이 활기차고 싱싱해진다. 관광으로만 다녔던 그동안의 제주와는 다르다고 감탄한다. 제주를 온몸으로 만나고 있음이다. 바비큐도 해 먹고 초밥도 직접 만들어 먹으며 행복해한다. 막냇동생 덕분이라고 칭찬한다. 기분 좋다. 지금 이 순간 좋은 것을 같이 누릴 수 있는 형제가 있다는 것이 복이라고, 욕심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서로 고마워한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도 여기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 우리가 직접 걸었던 제주의 땅들이 눈에 선할 것이다. 언니들이 떠나고 나서 그러고 있다고 톡을 보내온다.
두 번째 손님은 조카들.
여성동지 셋은 더 평화롭다.
이들과는 앞 팀이 갔던 곳과는 조금 달리한다. 젊은 여성 손님들이 좋아할 곳을 물색한다. 우리는 정말 현지 민박 주인처럼, 손님들의 취향에 따라 맞춤식 가이드를 계획한다.
가파도, 용머리해안, 형제섬을 떠안고 있는 창 넓은 브런치카페, 송악산 둘레길, 방주교회, 본태박물관 이렇게.
역시 감동이고 감탄이다. 힐링이라 한다. 우리는 참 고맙다. 제주에게도 무척 고맙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평화를 줄 수 있을까. 이들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눈에 선하다고, 일상을 잘 살아내겠다고 연락을 해온다. 기특한지고.
세 번째 손님은 역시 제주를 사랑하는 내 친구들.
가파도, 청보리와 유채꽃이 한창인 4월의 가파도는 이번 여행의 필수 코스다.
나는 이 봄에 가파도 세 번째다. 가파도는 올 때마다 다른 바람, 다른 색깔이다. 우리는 총천연색의 가파도 올레길을 걷는다.
그리고 처음 가보는 차귀도, 신평무릉곶자왈 숲길, 내 좋아하는 북카페, 신창해안도로 일몰과 돌고래 떼. 동백동산, 회국수 맛있는 바닷가 식당…….
아, 세 번째 다니는 곳도 매번 감동인데, 처음인 곳은 나도 감동 그들도 감동이다.
이 친구들과는 밤늦도록 기타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우리의 청춘 소환, 가사 다 기억한다. 추억 새록새록 돋는다. 술도 잘 넘어간다. 감성 절절이다.
우리의 깊은 인연은
그의 생일과 우리의 결혼기념일 30주년에 맞춰 마지막 손님, 우리 아이들이 온다.
30년 전 그날 우리는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다. 커플티를 입고 낯섦 속에서도 세상을 얻은 듯했다. 30년은 깊이 진중하게 그리고 후다닥 지나갔다. 지금 우리 아이 둘은 그때의 우리 나이가 되었다.
녀석들이 어릴 때 같이 걷던 올레길을 걷는다. 힘들다고 짜증을 내던 어린아이들이 이제 바다를 감상하며 풍경을 돌아보며 도란도란 걷는다. 세월은 내공을 쌓아주는 것 맞다. 인연은 우주가 만들어주는 것 맞다.
무수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선택적인 기억과 선택적인 망각을 지니고 있다.
어찌 다 기억하리,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지나고 나면 모두 우리의 내공이 된 것을.
사실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사람들, 사건들, 아픔들, 아름다운 일들, 상처들, 사라진 것들, 아주 사소한 사물이나 생물들, 바람들, 햇살들…….
모든 것들에게 감사를 드리고프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겠는가. 누군가의 도움과 위로와 연대가 30년을 한결같이 보내게 된 배경이다. 그래서 감사이다. 그렇지 않아도 감사인데, 그래서 더욱 감사이다.
센 바람이 제주답게 모든 것을 강하게 흔들고 있다. 유채꽃도 무꽃도 밭에 있는 비닐도 흙도 나무도, 내 마음까지도 흔들린다.
집으로 돌아가면 난 어떻게 사는 거지? 어떻게 살았더라? 꿈결 같은 날들은 사는 맥락을 다 잊게 했다. 생각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고 계획할 것도 없고 염려도 없는 지금, 여기, 제주를 걷고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생활의 감이 확 떨어졌다. ‘다시 복구해야 하나’ 하는 생각.
잘 살아가야겠지.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했기에 이리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건지,
몹시도 놀랍고 고맙고 미안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나라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생에서 조금이라도 갚고 가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진지함과 함께 마음 한편에 이는 잔잔한 바람,
집으로 돌아가면 좀 더 간결하게 단순하게 살아보자는 것!
깃털처럼 가볍게,
나비처럼 훨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