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 달 2
가장 단순한 삶은 인간적일까, 동물적일까.
제주에서는 살림살이가 간단하다. 딱 필요한 것만 있다.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부엌 싱크대엔 그릇 몇 개, 요리 기구 최소한의 것, 두 사람에게 적당한 작은 냉장고, 전기포트, 밥솥 정도. 이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 냉장고는 딱 2인용 정도여서 손님이 오면 작은 느낌이 있으나 그것도 궁리하기 나름, 쓸 만하다.
방에는 살림살이라곤 침대와 옷걸이가 전부다. 우리가 한달살이로 가져온 옷은 그 옷걸이와 거실에 있는 수납장이면 충분하다. 걷거나 나들이 갈 옷 몇 개로 생활한다. 필요한 옷이 많지 않다. 짧은 소매의 옷도 몇 개 있으니 한여름까지도 살 수 있다. 좀 두터운 가을 옷도 한두 개 있으니 맘만 먹으면 이것만으로도 가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용 가방 2개, 배낭 하나, 노트북, 기타, 악보와 책 한 권. 우리의 살림살이는 이것이 전부다.
서울의 집을 생각한다. 가구와 물건이 많다. 옷도 많다. 책도 많다. 베란다 창고에는 무언가 가득 채워져 있다. 작은 베란다 안 수납장에도 부엌살림 등이 쌓였다. 부엌 싱크대에는 그릇 등의 살림살이로 찼다. 언제 쓸 수 있는 것들일까, 언젠가는 필요한 것들일까……. 모르겠다. 찾지 않을 물건도 있을 것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갈 물건도 있을 것이다. 사실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것도 있을 게다.
여기 이 숙소에 있는 수준으로 완전히 줄이면 어떻게 될까. 많은 불편함을 느낄까, 아니면 오히려 가뿐하게 살 게 될까?
김치냉장고도 필요 없겠다. 김치를 사면 일주일 이상은 먹는다. 옷장도 필요 없다. 주로 걷거나 마실을 가거나 할 것이니 아웃도어 몇 개 있으면 될 것이다. 의례적인 자리에 갈 때 필요한 옷은 계절별로 단아한 걸로 한 벌씩만 있으면 될 것이고 양말도 다섯 켤레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책은 다 없애도 되겠다.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 가서 읽든지 빌려서 읽을 수 있으니까. 여기 올 때도 책 한 권 가져왔다. 충분하다. 집에 있는 책 다시 읽을 일 없을 것이다. 책 욕심으로 버리지 못하고 꽂아놓은 것, 이제 욕심을 버릴 때 되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한 달 임시로 거처하는 여행 공간에서의 살림과,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 언제까지일지도 모를 시간을 살아야 할 살림의 차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생활이, 살림이 그렇게 단순하고 소꿉장난 같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안다.
언젠가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기에, 버리는 것이 죄 같아서, 틈 있는 곳마다 찔러 넣고 숨겨놓은 우리네 어머니의 알뜰함도 경험했다.
그러나
한 달을 살든, 백 년을 살든, 우리네 인생은 이 땅에 잠시 머물고 가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인간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여행 오거나 소풍 온 것이라 하지 않는가.
아이들이 독립하고 우리 둘이 살게 되면 어떻게든 전환을 해보자고 얘기한다.
우리의 작은 공부방에다, 냉장고 세탁기 갖추어져 있는 단출한 오피스텔 같은 곳.
전철역이 가까우면 좋겠다. 차도 없앨 거니까.
우리가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 짐을 다 정리하고 가는 것이 맞다. 짐에 치여 사는 거 참 부질없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우리의 짐을 정리하는 난해한 짐을 맡겨서는 안 된다. 간결하게 살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자.
여행지에서 숙소를 떠날 때 우리의 짐을 다 정리하고 나면 그 숙소는 정말 깨끗하다.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말하곤 한다. 청소하기도 좋고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다.
이 정도로 족하다고 생각한다면, 한두 개의 캐리어에 다 넣고 여행 떠날 정도의 짐만 있다면,
'오, 당신 인생, 인간적으로 잘 살았다'라고 칭찬해 줄 수 있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