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포장길이 많다. 바에서 커피와 맛있는 크로와상을 먹고 출발한다. 매일 이런 간단한 아침 식사가 질리지 않고 맛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일단 크로와상 빵 맛이 참 좋다. 방부제를 쓰지 않아서 맛있는 밀 맛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속이 거북하지 않은 것은 한국에서와 다른 점이다. 여행 때마다 느끼는 이 밀, 우리 밀도 그런 것일까. 그리고 오렌지를 통째로 넣어 갈아주는 주스, ‘수모 데 나랑하(오렌지 주스)’, 중간 길 쯤에서 이 주스를 한 잔 사 먹고 나면 불쑥 힘이 난다.ㅎ.
로그로뇨, 큰 도시를 벗어나니 한적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공원이 나온다. 급한 용무를 근처 호텔에서 깔끔하게 해결하고 나니 오늘 하루도 산뜻하게 다닐 것이란 확신. 가장 본능적인 것이 해결되면 인간은 어쨌든 살아간다.
독일인 부부를 또 만난다. 이 부부는 늘 커다란 배낭을 지고 아주 씩씩하게 걷는다. 안부를 물으면 늘 굿! 단단한 독일 병정 같은 느낌, 그러나 좋은 느낌의 부부다.
호수를 지나 두 개의 마을을 지나간다. 포도밭과 포장도로. 고속도로를 따라 난 길을 걸어가는데 찻소리가 정말 시끄럽고 괴롭다. 길 따라 이어진 철조망에 나뭇조각으로 만든 수많은 십자가가 꽂혀있다. 무슨 바람을 담아, 그 고난의 십자가를 꽂아둔 것일까. 가톨릭 인구가 많은 스페인에는 마을마다 커다란 성당이 있다. 당연히 마을에서 성당이 제일 크다. 성당은 크기도 크기지만 그 안을 꾸며놓은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이 지구상에 이렇게 신앙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고 예배드리고 경배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 놀랍다. 각자의 신들에게 기도드리는 더 많은 사람들도 감안하면 우리 지구는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
‘멘토사’라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다. 스파게티와 샐러드와 맥주로. 맥주는 진정 맛있다. 유럽의 맥주, 물론 걷고 난 후의 맛이라 더 기가 막히겠지마는, 맛있다. 실비아를 만나다. 첫날 만난 슬로베니아인, 세 명이 일행이었는데 옆에 다른 건장한 남자와 있다. 같이 있던 일행 둘은 집으로 갔고, 새로운 좋은 친구를 만나고 있단다. 헉, 난 그때 일행이 당연히 남편인 줄 알았는데, 아주 친하게 며칠 동안 같이 걷는 것 봤는데... "남편은 어디 갔니? " 오지랖 안 핀 것 다행이다. 오스트리아 청년 토마스도 보다. 언어가 되면 사람들과 대화 나누고 재미있을 텐데, 아주 일차적인 통성명, 안부, 간단한 의사표현 정도이고 더 깊이 들어가질 못하니 좀 아쉽다. 영어공부 더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중요한 것은 아니고, ‘이왕이면’ 정도.
끝없는 평지를 걷다가 마을이 하나 나타날 때쯤 되면 저 멀리 마을의 형체가 보인다. 그 중심엔 꼭 교회가 있다. 아주 커다란 돔으로 된, 그 위에 십자가가 높게 서있는 것이다. 저기까지 가면 쉬거나 점심을 먹거나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마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거나 권위를 부렸거나 그랬을 것이다. 이 순례자의 길을 따라 교회가 생기기도 했단다. 그들을 재워주고 보호해 주고 이런 목적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무릎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온다. 거의 한쪽 발을 못 쓰는 사람처럼 발을 끌고 있다..... 근심의 안개, 어쩌나....
잠시 기도를 드린다. “ 저 절대 포기 안 할 거거든요. 걷게 해 주세요. 그리고 완주 후에도 잘난 척 안 하고, 교만하지 않을 게요. 여기서 멈추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고 걷는데 어느 순간 무릎에 아무런 신호가 없다. 통증의 느낌도 없다. 심지어 달리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다리의 쾌적함.. 이건 뭔가, 나의 기도가 통한 건가? 나에게도 이렇게 이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시나....
어쨌든 난 아주 가뿐하게 남은 7km 정도를 걸었다. 무릎이 아프지 않다. 걱정하고 있는 그에게 얘기하니 더 이상하니 '방방 뛰지마시고' 조심 걸으란다.
오늘 알베르게는 2인실이다. 씻고 낮잠을 따듯하게 자고 저녁을 순례자메뉴로 먹는다. 12유로, 물론 와인과 함께. 여기 식당들의 와인 인심! 와인 한 잔이 아니고 늘 병째로 준다. 맘껏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집에서는 한 잔이 기본 용량인데 여기서는 두 잔, 석 잔까지도 마신다. 와인 좋아하는 사람이나 여러 명이 같이 온 경우는 이 와인 인심이 퍽 좋을 것이다. 낮에는 순례자 모드, 저녁에는 여행자 모드로 지내고 있다. 낮에는 길과 풍경에 집중하고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다. 감사 감사 감사이다.
오늘은 J와 M을 위한 기도이다. 착한 그대들, 주님이 그대들을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가정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그 아이들을 잘 보듬어주시기를,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주변 식구들도 위로해 주시길, 이제 기쁨의 날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7-1코스 서귀포버스터미널~제주올레여행자센터 15.7km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7-1코스를 걷는다. 서귀포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서 시작 도장을 찍고 긴 거리를 걷는 몸을 위해 스트레칭으로 풀어주고 출발.
먼저 엉또폭포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몇 줄기의 웅대한 바위가 깊숙한 원시림에 서 있는 자세로, 비가 오면 엄청난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는 엉또폭포다. 예전에 남들이 찍어놓은 유튜브를 보니 정말 대단하였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좀 뚱뚱한 바위인데 비가 오면 엄청난 폭포로 변신하는 '엉뚱한 폭포'.
들낭숲길 두 개를 걷다. 길 양쪽은 곶자왈을 거느린 늘 좋은 숲. 숲을 나오자 바로 고근산으로 들어선다. 지난번 때와 거꾸로인 방향으로 오른다. 내려올 때 무척 가파른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여 스틱을 하나씩 가져갔는데.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른다. 좀 뻐근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씩씩하게 오른다.
드디어 고근산 정상, 하늘 푸르지요, 구름 뭉게뭉게 하얗지요, 공기 상쾌 해 쨍쨍하지요...
크루아상과 커피를 점심으로 먹는데 이 또한 천국의 식사이다. 몽블랑에서 경험했던, 산티아고의 아침이었던...
바람이 그렇게 시원하게 불 수 있나. 낮에 걸을 때 기온만 좀 낮아주면 금상첨화련만, 제주는 아직 늦여름이다. 너무 뜨겁고 덥다. 먼저 막 내려오다 길을 잃다. 리본이 없구나. 다시 뒤로! 리본과 올레 화살표시가 나무 사이로 숨어있네. 이런.
걸을 때 경치에 잠시 정신을 놓다 보면 리본도 놓친다. 그럴 땐 무조건 올레길을 안내하는 리본을 봤던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거기부터 다시 길은 열려있다.
하논분화구. 제주에서 유일하게? 라 했나, 벼농사를 하는 곳이란다. 분화구를 보니 이미 추수는 끝났고, 남은 자리는 귤나무가 자라고 있다. 트랙터에 타고 계신 할아버지께 예쁘게 인사하니, 전지가위를 주시며 귤 하나 따먹고 가라신다. 와우! 조그마한 게 시큼하고 달콤하며 맛이 좋구나. 조생귤인가? 어제도 걸을 때 착한 주인아저씨가 직접 따서 주시더니..
"제주의 올레길을 걸을 때 귤밭을 만나면, 길 가장자리에 있는 귤나무는 걷는 이들이 한 개씩 따먹어도 좋게 하면 어떨까? 귤이 이렇게나 많은데 땅에 떨어져 있는 것도 아깝고, 인력도 모자라는 것 같고, 따먹고 나서 고맙거나 맛있어서 택배로 주문할 수 있도록 하면 참 좋겠다. 그치?"
이러고 친구랑 세월 좋은 얘기하며 걷는다. 공짜로 귤 얻어먹었으니 일단 서울 올라가면 제주 귤 주문해서 먹자고 다짐도 하고.
걷고 걷고 걸매생태공원으로. 서귀포시 곳곳에 공원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다. 옛 사진을 보니 비닐하우스로 채워져 있던 곳을 아주 멋진 공원으로 만들었다. 생태공원, 그냥 평범하게 나무 심어놓은 공원이 아니라 스토리가 잘 짜인 공원 느낌이 난다. 정자 쉼터에서 남은 귤 하나 까먹고 공원에 나온 사람들 구경도 한다. 공원은 사람을 참 여유 있게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같다. 천천히 종점 올레센터로 향하여 골목골목을 걷는다.
2시 반까지 버스에 다 모였다. 약속 잘 지킨다, 걷는 사람들은. 짧은 거리,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다. 오늘도 잘 걸었다. 곤하다. 샤워하고 맥주 한 캔 하다. 좋아라. 오늘도 수고한 나의 친구와 나의 다리와 몸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