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지다. 배낭을 지고 걷는 것은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연세 드신 분들이 이따만한 배낭을 메고 걷는 걸 보면 대단타. 젊은이들이 걷는 것을 봐도 그렇다.
오늘 길도 참 아름답다. 춥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선선하고 맑은 날. 중간 마을에서 빵과 커피와 주스를 마시고 잠시 음악을 들으며 경쾌하게 걷는다. 광활한 유채꽃밭은 정말 끝이 없다. 그러나 더 멀리서 돌아보면 마치 퀼트 작품의 조각처럼 보인다. 입 벌어진다.
1시에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도착하다. 서른두 개의 방이 있고 가격은 8유로. 착하다.
햇살이 너무 좋아 빨래를 해서 널다. 샤워도 끝내고 나니 가뿐하다. 우리 방은 여섯 명이 쓰는데 그중에 한 팀은 둘째 날 아침 론세바예스 식당에서 만난 젊은 커플이다. 남자 얼굴엔 '나 범생'이라 쓰였고, 여성 동지도 순하고 예쁘게 생겼다. "우리 딸아이가 저런 남자 만났음 좋겠다~" 얘기하면서 걸었는데, 그 둘은 빨래 광고 찍는 연예인처럼 사이 좋게 빨래를 탈탈 털어 널고서는 풀밭에 벌렁 누워 햇살맞이를 한다. 아, 예쁜 아이들이다. 친구인지 신혼부부인지는 모르겠으나 30여 일을 같이 여행하는 멋진 젊은이들이다.
2시 30분도 안 됐다. 이제 빨래는 좋은 햇살을 만나 신나게 마를 것이고 우리는 구경을 나간다. 조그만 동네, 점심으로 치맥을 하기로 한다. 맥주 맛 끝내주고 닭날개 튀김과 감자튀김이 바삭바삭바삭이다. 길도 길이지만, 낮에 맥주 한 잔 하면 그냥 천국에 온 듯하다. 들어와 정리하고 잠시 낮잠 한잠 자면 그게 바로 꿈길이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식당에서 그 젊은 남자아이가 부지런히 요리를 하고 있다. 여자아이는 포크 들고 식탁에 앉아 기다리고. 남자아이가 스파게티인지 요리를 해서 딱 식탁에 올려놓는다. 정말, 아들 잘 키웠네...
우리의 저녁은 빠에야, 뿔뽀, 상그리아로. 스페인의 술 상그리아가 또 이런 맛이구나. 음, 상그리아 맛이야~.
8코스 월평아왜낭목쉼터~ 대평포구 19.6km
어젯밤 잠을 심하게 설쳤다. 수학여행 온 녀석들이 마지막 광란의 밤을 보낸 것이다. 꽥꽥 목소리는 기본, 문 두드리는 소리, 쾅쾅 뛰는 소리, 가구 끄는 소리, 달리는 소리... 아, 정말 늦도록 못 자고 새벽에 깨고 이른 아침에 깨고... 오늘 걸을 수 있으려나.
흥분하지 않으려 심호흡한다. 10월 내내 수학여행단이 묵을 것이고, 오랜만에 집 떠나온 아이들을 넓게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안내문이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었다. 교사였던 내가 아이들 그런 상황을 이해 못 할 리 있나, 초반의 있을 법한 소음은 참았는데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교육 이런 거.
자신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폭력이란다. 엄마들도 오랜만에 집을 떠나 자유롭고 싶고, 쉬고 싶단다. 우리도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묵고 있단다. 여기는 아파트와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 곳인데 아무리 자유로운 수학여행이라 해도 밤에 그런 난리부르스는 좀 심하지 않니. 그건 자유도 아니고 수학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지..... 너희들에게 남을 배려하라는 기본적인 교육을 소홀히 한 어른으로서 미안하기도 하다만.
성수기에 호텔 측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대책을 세우고 돈을 버셔야지. 다른 손님들의 심한 불편이 예상되는데, 한 층은 비워둔다든지 방법을 강구했어야지 이런 상태로 한 달은 못 견딘다. 결국 이야기를 전했다. 죄송하단다. 개선하겠단다. 말로 말이 통하는 것은 다행. 상식적이라는 얘기니까. 말로 안 되는 것이 제일 무섭다 나는, 애들이나 어른이나.
오늘 긴 거리를 걷는데 참으로 힘들겠다. 날도 더울 게고. 그러나 잘해보자.
제주의 10월은 왜 이리 더운 게야! 따갑고 뜨겁고 죽갔구만...색달해수욕장을 저 아래로 하여 가파른 계단길을 오른다. 헉헉거린다. 그리고 나타난 카페 ‘바다바라’, 온 바다를 다 얻은 배경이다. 한라봉주스 하나 시켜놓고 떡이랑 커피랑 점심으로 먹다. 바람 살랑거리고 그늘에서 중문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더위 가시고 눈이 확 트이고 아름답고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올레길 열심히 걷고 보상받는 느낌이다.
중문관광단지를 지나는 길은 좀 재미없다. 좋은 호텔 다 모여있고 재밌는 관광지 많고 사람들 많은데 길은 지루하다. 확실히 '걷기'와 '관광'은 종류가 다른 모양이다. 난 당근 '걷기' 편.
예례생태공원으로 들어오다. 여기부터는 평화로운 길, 봄이면 얼마나 예쁠까를 생각하며 걷다. 흐르는 좁은 천을 따라 우람한 벚나무가 줄지어 있다. 무슨 일인지 나무에 벚꽃 몇 송이 피어있다. 가을에 피는 벚꽃인지, 봄에 핀 것이 아직도 지지 않은 건지... 습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예례동 사람들 산책하기에 참 좋겠다.
드디어 바다로 나오다. 논짓물. 예례생태공원 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인 듯, 햇살을 등지고 한라산을 바라보고 발을 담근다. 돌멩이들에게 지압도 받다. 시원하구나. 이제 바닷길을 계속 걸으면 포구에 닿을 게다. 멀리서 산방산과 박수기정이 보인다. 언제 봐도 반갑고 멋진 저 둘! 종점까지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다. 하예등대, 하예포구... 다 정겹다. 드디어 대평포구 빨간 등대와 소녀가 보인다. 카페 루시아를 지나 포구 쪽으로 빠른 걸음을 걷는다. 마지막 1km가 항상 길다. 종점 도장을 찍고 미련 없이 루시아로 되돌아온다. 산방산, 용머리 해안, 송악산, 형제섬, 마라도 가파도까지 펼쳐지고, 무엇보다 바로 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절벽 박수기정을 볼 수 있는 곳, 여기에 오면 감탄이 절로 터진다. 현실감이 없어진다. 유채꽃이 한창인 봄에는 더 환상인 걸 안다.
오늘도 끝냈다. 뿌듯하다. 혼자가 아니라서 금방 끝낼 수 있었을 게다. 내일은 군산오름을 걷는 9코스. 오면서 이미 군산오름의 귀여운 두 귀를 보다. 멀리서는 그렇게 높고 사납게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두루뭉술 귀여운 이빨 같이 보이는 저 봉우리! 거기서 보는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