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보니 두 젊은이는 벌써 떠났다. 게다가 부지런도 하여라. 씻고 정리하고 나서니 7시. 동네 카페에서 아침을 먹다. 늘 그렇듯이 빵, 주스, 카페콘레체. 든든하다.
오늘은 날이 쨍쨍할 듯하다. 자동차와 함께, 도로 N120과 함께 한다고 되어 있다. 역시나 덥다. 중간에 트럭에서 주스를 사 먹고 기운 내다. 서울 가면 꼭 이 오렌지 통째로 갈아먹는 기계를 사야겠다 맘먹는다. 무릎이 잘 견뎌줘서 감사하다. 분명 기도를 들어준 것이리라 믿으며 까불지 말고 잘 걷기를.
계속 찻소리를 들으며 걷다. 차로 가면 참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평탄하고 편안한 길, 풍경은 눈으로만 쏜살같이 훑고 가는 길, 우리는 간혹 이 길을 멋지고 빠르고 쿨한 길이라 생각하고 산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은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길을 좀 힘겹게 걷는다.
나무 밑에서 노부부가 쉬고 계시다. 프랑스인으로 이곳에 세 번째 오셨다고. 우와~ 우리는 그분들 나이가 참 궁금하다. 무슨 상관이랴 싶지만 연세가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여길 걸을 생각을 하셨을까, 심히 궁금하다.
“우리 아저씨도 오고 싶어 하시는데 나이가 염려되시나 봐요. 실버풀레(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노, 노, 쉽지 않아요. 우리는 세 번에 걸쳐왔어요. 처음 생장드포 오를 때는 어려워요. 긴 길이에요. ”
결국 연세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대단하시다.
벨로라도에 도착하다. 유명한 알베르게라는 ‘Cuatro cantones’. 6인실 쾌적하다. 일단 짐 던져놓고 Bar로 점심 먹으러 간다. 또띠야와 맥주. 아, 살 것 같다. 더위가 아니라 햇살 좋은 게 느껴진다. 샤워하고 잠시 자고 나온다. 주방에서 정리하고 시간을 보낸다. 혼자 온 한국아저씨와 잠시 수다 떨고. 책이 있으면 좋으련만 가방 무게 때문에 하나도 안 가져온 것이 좀 아쉽다. 그 많은 시간 할 게 없으니 그냥 어슬렁이다. 삶은 순례이기도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살면 그것도 의미 있는 삶이란 생각이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려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일이다.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하면서 앞에 앉은 이탈리아인 치과의사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영어권이랑은 대화하면 딸린다. 내가 질문하거나 얘기할 땐 괜찮은데 그들이 본격적으로 응대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 빠르고 모르는 단어 하나 나와도 삐걱거리고 발음도 몬 알아듣겠고. 비영어권은 단어만 대도 대충 서로 이해하고, 말하는 속도도 빠르지 않아 더듬거리며 천천히 하니 알아듣기 편하다. 수준이 딱 맞다. 남자는 선량한 얼굴로, 자기 나라는 버는 돈에 세금을 너무 많이 떼어가는 게 불만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여자는 아주 쾌활하다. 결국 자식과 손자 사진을 보여주는 데까지 이른다. 50대로 보이는데 벌써 손자냐고 하자, 활짝 웃으며 자기는 60대이며, 나는 40세로 보인다고. 나는 더 활짝 웃으며 리얼? 이번 여행 최대의 수확?
오늘은 K군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 아이들과 부모님을 위해서도. 그리고 언젠가 좋은 새 사람을 만나기를. 잘 견뎌내길. 기도를 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9코스 대평포구~화순 11.8km
몸풀기 체조 마치고 바로 박수기정(바위틈 사이로 물이 흐른 절벽의 길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줬다.) 옆길로 오른다. 몰질, 말이 공물을 바치려 다니던 길이란다. 가파르다. 원래는 박수기정 위를 걸었다는데, 사유지여서 주인이 마음 바뀌어서 못 간다고. 저 절벽 위의 길을 걷고 싶다. 저런 멋진 절벽이 어떻게 사유지가 되는가?
봄날에 군산오름을 보고 걸어가는 길에 나타난 무밭과 유채꽃밭을 기억한다.
"갑자기 나타난 너른 무밭은 무릉계에 온 듯한 환상적인 느낌이었어. 제주는 정녕 봄이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싶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작은 절 앞에서 잠시 휴식. 바나나 하나와 두유를 꿀맛으로 먹는다. 저 앞에 산방산이 나타나고, 발 밑은 하얀 메밀밭이다. 그림이구나. 스틱을 꺼내 숲으로 들어선다. 군산오름으로 오르는 숲길. 시인과 촌장의 음유 음악이 딱 어울리는 그런 숲이 나타난다.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완만한 숲, 무성한 숲, 평화로운 숲... 우리는 사람 다 올려 보내고 맨 뒤에 올라간다. 사람 소리 없이, 서두름 없이 오늘 길을 걷고 싶구나. 시인과 촌장의 '숲' 노래를 들으며 올라간다.
군산오름은 아름다운 숲길로 편안하게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계단으로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오늘 걷는 9코스는 난이도 '상'으로 표시되어 있다. 군산오름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길은 짧다. 올레길에서 난이도를 매기는 등급은 '길이'로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길이가 너무 길면 그게 힘들다.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 그냥 끝없이 주욱 걸어가야 하는 일직선의 긴 길... 내게는 이런 길이 ‘난이도 상’이다.
정상에 오르면 어떤 풍경이 보이는 줄 알기에 계단을 빨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차로 주차장까지 올라와서 기막힌 일몰을 본 적이 있다. 정상엔 특별하게 간세 모양의 긴 의자가 놓여 있는데, 거기 중간 스탬프가 있다. 올라온 사람들이 다양한 포즈로 기념 촬영을 오지게 한다. 우리는 저쪽 바윗가로 가서 햇빛을 가려주는 자리를 찾아 앉는다. 앞에 펼쳐진 한라산, 뒤에 펼쳐진 산방산은 고정 배경, 유부초밥과 커피, 어김없는 천국의 식사다.
일행들 다 내려갈 때까지 앉아 풍경 감상이다. 이제 우리 팀은 보이지 않는다. 한라산과 산방산과 함께 사진 찍고 어슬렁 내려간다.
안덕 계곡에서 발을 너무 오래 담갔다.
거리 계산, 시간 계산을 잘못하여 마지막 그 동산, 꽃이 만발했던 그 동산, 진모루 동산에 눈길 한번 줄 새 없이 쌩하니 날 듯이 지나쳐 온다. 화순해수욕장도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시간 정각에 버스에 골인한다. 길이 짧다고 느긋하다가 막판에 다리가 참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