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를 향해 산을 하나 넘어오는데 저쪽에 큰 공장이 있다. 작물이 끝없이 펼쳐진 것만 보다가 저런 공장 건물이 나타나니 신기하다. 그러나 오르막에 다달아 꼭대기에서 바라본 부르고스의 모습은 좀 겁이 나기도 한다. 대도시답다. 많이 크다.
드디어 긴 공항 대로를 지나 길이 죽죽 뻗고 여기저기로 복잡하게 이어진, 그래서 빵빵대며 오가는 차를 피해 길을 건너기가 겁난 부르고스에 도착하다. 그러나 거기부터가 문제였다. 초입이 무슨 공장지대 같은데 그 황량하고 재미없는 도심의 길이란. 게다가 한 구석은 도로공사를 하고 있고 길을 안내하는 노란 길 표시는 없고 앞에 있던 순례객들도 갑자기 사라졌다. 한 명도 안 보인다. 완전 난감이다. 그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4km 정도 주욱 걸어가면 성당이 있고 중심가가 있는 길이 나오겠다만, 그렇게 걸을 생각을 하니 정말 싫다. 강으로 가는 우회로가 있다고 책에서 봤지만 우리는 찾지 못했다. 그냥 그 말도 안 되는 길을 가야 한다.
차는 질주하고 사람들은 이 복잡한 시대에 웬 순례? 하는 눈빛인 것 같다.
서로 인사하고 격려하고 하는 분위기와 완전 다르다. 도저히 안 되겠어 지나가는 아저씨한테 길을 물어보는데 '여기, 저기'로 가면 길이 나올 거고 '거기' 길로 가라고 친절하게 손짓을 한다. 땡큐! 아담한 공원이 나온다. 배가 고프다. 벤치에 앉아 싸 온 빵을 먹는데 저쪽으로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보인다. 저 길이다. 강변으로 난 길이 보인다.
도심으로 들어오고 성당들이 나오고 오래된 유럽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아, 그리고 우리가 예약해 둔 호텔이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여기서 2박을 할 거다. 부르고스 성당과 도시의 중요한 곳을 구경하기 편리하겠다. 아담하고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호텔은 무척 맘에 든다. 알베르게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방과 욕실... 좋아라. 호텔 앞에는 발마사지숍이 있다. 약 40분간 정성스럽게 마사지해준다. 열흘간 쌓인 피로와 뭉침들을 잘 풀어준다.
빨래방에서 빨래도 마치고 카페에서 닭다리랑 맥주도 한잔하는데 역시 좋다. 내일은 푹 쉬는 날이다.
부르고스에서 휴식, 걷기 쉼.
느지막이 일어나 부르고스 대성당에 가다. 세비야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라 하고 워낙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니 기대된다. 입장료가 6유로인데 순례자는 4.5유로를 받는다. 겉모습부터 질리게 크다. 내부는 조각,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물품,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것 없이 화려하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저 꼭대기 십자가에 초라하게 계시는데...
신앙심이 깊고 장엄할수록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오는 길에 숱하게 서있는 거대한 성당들을 보면서 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교황의 권력, 교회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성당을 그렇게 크게 지었을 수 있다. 건축가나 화가 등 예술가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그렇게 혼신의 힘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표현했을 수는 있다. 어느 정도 신심이 없으면 불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본질과 한참 멀다는 생각이다. 인간을, 자신을 드러내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무엇이 신심이고 신앙일까. 예수님은 아주 초라한 곳에서 태어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겼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주고 떠나셨다. 이런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은 그분의 가르침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오늘날의 대형 교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좋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일까?
성당을 나오는데 이탈리아인 치과의사부부가 들어온다. 을마나 반갑게 인사하는지, 오늘이 마지막이고 내일 마드리드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간단다. 내년에 다시 올 것이라고. 저녁을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중국식당을 갈 예정이라 했더니 아쉬워한다. 생각해 보니 식당엔 낮에 가는데, 착각. 진하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운이 좋으면 저녁에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인사를 했는데 잘 몬 알아듣는다.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진을 빼고 대화를 할 생각을 하니 그냥 잘했다 싶다.
점심 식사를 하러 중국 식당 ‘wok’에 간다. 맛있게, 풍족하게, 아주 만족스럽게 먹다.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부부와 잠시 눈인사만 나눴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데 맥주병을 들고 오는 남자와 로비에서 만나다. 잠시 정보를 나누다가 그가 지금 내 모교의 교수라는 것! 이런... 그냥 헤어질 수 없지. 한 잔 하자고 넷이서 다시 바로 나간다. 학교 얘기, 사람 얘기, 그때 얘기....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어로 풍족한 대화를 한다. 학번이 하나 위인 그가 술을 사기로 한다.
일요일 휴식, 걷기 쉼. 서귀포 도서관
아침해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바로 방으로 쏟아지는 해를 감당할 수가 없다. 방은 금방 더워지고, 션찮은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도 더워지고, 도서관 가자.
밖은 서늘하고 바람 불고,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헬렌니어링 책 마무리하고 브런치북 글 하나 올린다. 이런 휴식도 좋구나. 아마 이 도서관도 오늘이 마지막이려니. 다음 주 일요일엔 추자도 가고, 그 다음 주엔 한라산 가고, 그리고 그 다음 주 우리는 제주를 떠난다. 이제부터 시간은 또 막 흘러갈 것이며 아쉬움 남을 것임을 안다. 지금 누리길. 그럴 것이다.
10-1 코스 가파도 4.2km
봄 청보리 보러 몇 번 오고, 가을 가파도는 처음이다.
청보리 없고 유채꽃 없고, 그 자리에 익은 벼처럼 누런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그 또한 운치 있다. 우리의 카메라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가파도, 봄철의 가파도와 다르게 한적하다. 바람은 불지만 해가 작렬하고 있어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날, 우리는 자유롭게 걷는다.
종점 도장을 찍고 조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간다. 파라솔과 나무 의자가 몇 개 놓여있는 조용한 곳이다. 해물라면에 청보리 막걸리를 시킨다. 주인이 해물을 듬뿍 넣어 줬단다. 사람이 많지 않으니 무엇이든 여유가 있구나.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어? 둘 다 입이 헤 벌어진다. 깔끔히 치우고 나온다.
낮고 넓게 퍼진 섬 가파도, 안 걸었던 곳 걷고 바다도 더 넓게 돈다. 춥지 않은 바람이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부드럽게 휘어지게 한다.
남은 시간 차 한 잔 마시려던 그 카페가 오늘 문을 닫았다. 가파도가 좋아 서울서 무작정 내려왔다는, 가파도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 공방도 하는 주인이 운영하는 작고 예쁜 카페인데. 주인 없어도 카페 야외 의자에 앉아 산방산, 송악산, 흐린 한라산, 모슬봉, 형제섬... 다 보다. 풍경은 여전히 변함없구나.
제주의 반쪽을 걸었다. 이제 반쪽 남았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이 단순한 일상이 사실은 많은 시간을 담고 있구나. 일기를 쓴다. 나중에 여행기로 정리할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