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이 지역을 볼 게 없다 하고, 누구는 장관이라고 한다. 볼 게 없다니.... 끝없는 지평선은 아름답다.
'장관이다'에 두 표.하늘은 완전 파란색이다. 상상해 보시라, 이 두 자연의 색과 자유로운 인간들의 걸음을......
1시에 시끄러운 아저씨가 주인인 알베르게에 도착하다. 예약이 이미 다 찼다고 문에 붙어 있다. 예약을 해놔서 다행이다.
저녁은 빠에야. 쌀이 덜 익었다. 숙소에서 같이 먹는 빠에야는 이제 먹지 않기로 한다. 많은 양을 찌니 쌀이 익지 않아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알베르게 아저씨는 안소니퀸을 닮았다. 빠에야를 남기는 것이 미안해서 칭찬 겸 아부로 그렇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끄덕이며 동의하는데 정작 아저씨는 빠에야를 남겼다고 맛이 없냐고, 섭해하기만 하고 반응이 션치 않다. 안소니퀸을 안 좋아하시나?
오늘은 P여사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기도하는 사람답게 하루 양식에 족하며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도드린다.
11코스 하모체육공원~무릉외갓집 17.3km
모슬포항의 잔잔한 포구와 배들을 사진에 담다. 말 그대로 잔잔하다. 모슬포 5일장 시장을 지나 바닷길로 접어든다. 바람은 아침 인사 하듯 얌전히 불고, 파도는 눈썹 모양으로 얇게 일렁이고, 쪽빛 바다는 늘 그렇다는 듯 바다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 바다를 조금 엄숙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모슬봉으로 오르는 길.
매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다리에 근육 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쉬지 않고 걸었다. 드디어 모슬봉 숲으로 들어간다. 걸음을 늦춘다. 포장도로를 열심히 오르다 나타난 숲길에 나는 안도한다.
중간 스탬프를 찍는 정상의 풍경은 나무랄 일 없다. 모슬포의 평야가 펼쳐지고, 한라산, 산방산, 바굼지오름이 티 없이 선명하다. 단, 머리 위의 강력한 태양과 맞서야 한다는 것. 무지 뜨겁다. 쉴 곳을 마련하지 않은 이유가 저기 레이더 기지를 둔 군부대 영향인지 모르겠다. 힘들게 올라간 정상에서 사진 한 컷 찍고 돌아 내려온다.
제법 큰 마을 공동묘지가 나타나고 개인 묘지도 나오고 좀 살 것 같은 집안의 묘지도 지나온다.
"올레길에 이런 묘지를 지나가게 만든 이유가 있을까?" 그러고 내려오는데 아까 올라온 길이 다시 나타난다. 어, 이거 아닌데?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일까? 그때 마침 다가오는 청년, 핸드폰을 켜고 앱을 보며 길을 걷는 모양인데, 여기가 길이 아니라니 당황한다. 앞에 우릴 보고 그냥 걸어온 것 같은데, 앱을 확인해 보더니 50m 벗어났다고 한다. 표지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가니 화살표 방향은 맞았으나 옆에 좁은 길이 나있다. 그리로 갔어야 했던 것. 됐다. 젊은이 땜시 길을 알았고, 우리 땜시 모슬포로 원위치할 뻔한 이 구해준 거고.
"근데 왜 젊은 아이들은 길안내 앱을 보면서 걸을까? 리본 다 걸려있는데 말이야. 이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 볼까?"
우린 또 이러고 아쉬운 오지랖을 나눈다.
정난주묘에서 점심을 먹다. 난 아직 모르겠다. 나라를 대적한 이들의 선교와 신앙을... 추자도에 가면 그들의 흔적이 있다는 김연수의 소설을 봤는데, 그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이제 내 사랑 신평-무릉 곶자왈로 향한다.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 아름다운 숲. 역시 동굴숲, 완전 파아란 하늘, 바람에 제 멋을 내는 억새들.... 한 3킬로 정도 걷는 건가. 아름다운 숲이다. 곶자왈의 숲은 짙푸른 나무들 사이로 꽤 넓은 평탄한 길로 우리를 편하게 안내한다. 감탄이 절로 난다. 우리에게 숲을 보여줘서 너무 고마워. 언제 와도 이 모습으로 있어줘서 고마워. 이렇게 감동을 줘서 고마워. 사실 난 숲이 뭔지도 몰랐던 사람이지. 철이 들고 숲을 알게 되고, 숲이 고맙고, 그 길을 걸으면서 안식을 얻지. 역시 무릉 곶자왈이야.
무릉곶자왈
나머지 길은 그냥 걸어온다. 집중했던 내 영혼은 이제 아무런 짐이 없다. 종점인 무릉외갓집은 초등학교 건물이었던 곳에 새롭게 옮겼다. 싱싱한 주스도 하나 사서 마시고,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는 바람 따라 그냥 앉아 있다 차를 타고 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