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메세타 고원을 지난다 한다. 아침에 짙은 구름이 끼고 초입에 만난 미쿡아저씨와 싱거운 인사를 나눈다. 나보고 영어 잘한다고, 어디서 배웠냔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지겹게 배웠걸랑요. 그러자 자기는 “안녕하세요!” 딱 이거 한마디밖에 못하는데 자기 한국어 실력보다 내가 훨 낫다고... 헐! 훨??? 이런 젠장, 말이라고. 진짜 잘하는 줄 알았네....
비가 흩뿌리니 우비를 입다. 내 우비 맘에 든다. 비가 뿌리지 않았으면 참 더운 길이었을 게다. 이번 까미노에선 날씨가 확실하게 도와준다. 감사하다. 끝없는 벌판이 황무지 같은 느낌도 들어서 이왕이면 밀과 보리가 좀 더 자랐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 정도도 감사하다고 마음을 바로 고쳐 먹는다.
중간에 먹을 데가 없으니 준비 단단히 하라는 정보가 무색하게 바로 카페가 나타나 신나게 주스와 크로와상을 먹는다. 얘네들, 언제 어디서나 맛있다. 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 화려한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하늘은 언제쯤 미세먼지로부터 벗어나 명성을 찾고, 맘 놓고 걸을 수 있을까 생각나게 하는 하늘이다.
아스팔트길을 약 3km 걷다. 아스팔트는 힘들다.
숙소는 한국인 여성이 운영하는 orion! 저녁메뉴가 비빔밥이란다. 주방엔 세월호 리본이 붙어 있다. 걷는 동안 이 리본이 있었음 했다. 달고 다니면 좋았을 텐데...너무 반갑고 고맙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서 김치에다 밥을 먹다. 황홀해라. 가끔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스페인 음식이 입에 맞아 특별히 한국 음식이 그립지는 않으나, 열흘에 한 번쯤만.
주인은 까미노를 몇 번 걷고 2016년에 알베르게를 열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공기, 차별 없는 인간중심 사고들이 좋다고. 그러나 월화수목금금금의 휴식 없는 몇 개월이 힘들다고. 숙소를 보니 깔끔하게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하려면 힘들 것을 안다. 우리 언니가 그랬으니까. 겨울에는 문을 닫으나 봄부터 가을 성수기까지 하루도 쉬지 못하니 엄청 힘들 것이다. 낭만은 아니라고 하는 걸 보니 그럴 듯. 먼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 잘 지냈음 좋겠다.
오늘은 H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 어린 아이가 어떤 상처를 입었을까. 어떻게 그리 힘들게 살 수 있을까. 주님,그 어린 것을 살펴주시고 아픈 마음을 치유해주세요. 그 부모를 위로해주시고 앞날은 늘 기쁨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내 기도의 마무리는 ‘이제 그만 아프게 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앞으로의 삶은 기쁨이 넘치게 해주세요.’ 이렇다. 아픈 이들이 많다.
12코스 무릉외갓집~용수포구 17.5km
도장 찍지 않고 걸을 때 이 코스는 신도포구에서 시작했던 것을 기억해내다. 어쩐지 오늘 시작 길은 낯설다 했다. 무릉외갓집에서 신도포구까지의 길 9.5km를 빼먹고 걸은 것.
녹남봉. 처음 듣는 오름, 작은 봉우리가 계단길로 가파르게 이어져 있어 생각지도 못한 힘을 빼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은 역시 동굴숲. 제주 오름의 거의 모든 길이 이렇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다. 가파른 길로 올라가서 돌아내려오는 길은 전형적인 숲길, 우거진 동굴숲, 그 사이로 끼어들려 애쓰는 햇살.
평지에서 빨리 걷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달리고 싶을 정도로 걸음이 마구 빨라진다. 다리가 묵직해 오지만 호흡은 충분한 것 같고 쾌감까지 느껴진다. 마라톤 하는 사람들이 이런가.
드디어 수월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메밀밭, 예전에 그 예쁜 무밭이었던 곳이 대부분 메밀밭으로 바뀌었다. 육지에서는 다 끝난 메밀이 여기에서는 이제야 지천이다. 아름답도다. 그 외 야채들, 채소들, 이름도 잘 모르겠는 것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브로컬리도 보았고, 양파 모종도 보았고, 양배추 널브러진 것도 보았고, 무의 가지들도, 감자도, 콩도, 쌈채소도...푸른색의 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다. 제주의 작물들이 이리 다양하다. 비도 안 오고, 땅이 마르기도 했고, 햇살이 너무 강렬한데, 어떻게 저리 기특하게 잘 자라는 건지...
수월봉 정자에서 바라본 차귀도는 여전히 고요하다. 그리고 작명 기가 막힌 ‘수월해지다’ 카페에 들러 청귤쥬스 한 잔하고 원기 회복하고 내려온다.
이제부터 차귀도의 시간들... 당산봉으로 오르는 길로 들어서다. 푸르고 넓은 밭은 기본이고 오징어까지 주렁주렁 널려 말라가고 있고, 우리의 몸도 익는 것 같은 쨍쨍한 여름날이다. 얼른 당산봉 숲으로 들어가자. 오르는 길, 그러나 앞에 녹남봉으로 이미 주사를 맞은 상태, 당산봉 오르는 길은 점잖은 느낌이다. 천천히 올라간다. 일행은 아무도 없다. 우리 둘뿐이다. 생이기정길까지 이르는 길, 차귀도와 짙푸른 바다, 광활한 바다가 오늘 끝까지 같이 간다. 살랑이는 바람이 우리를 살려준다. 용수포구가 보인다. 억새 휘날리며 차귀도는 역광을 받아 검은 섬으로 그림 같이 멈춰있다. 그 안의 시간은 멈춘 것 같다.
용수포구 앞에도 오징어가 날잡아잡숴 널려있다. 버스 타기 전 40분의 여유가 있다. 흠, 잡숴줘야지, 두 마리 구워달래서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 맥주 한 캔씩 한다. 기가 막히구나. 이제 이렇게 하루 걸음을 보상하기로 했다. 꿀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