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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까리온/ 한림항

by 순쌤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Carrion 16km

어젯밤에 몸살로 막 아픔. 다른 이들은 32km 도전한다더니 벌써 다 나갔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가는 길 말고 대체길인 오솔길로 가기로 한다. 작은 강, 우시에사 강을 따라 걷는 이 오솔길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원래 까미노 길인 저쪽 도로는 간혹 차가 달려가고 걷는 사람이 개미처럼 보인다. 들판은 초록이 덮고 있고, 비가 뿌리나 바람이 불지 않아 쾌적하게 걷는다.


어딘가에 길 위에 걷는 사람이 보이면 반갑다.

어제 네덜란드 여자는 사람이 많은 도시 ‘레온’은 그냥 지나질 예정이라 했지만 난 레온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른다. 거기 가면 약 2/3를 걸었다는 거고, 그러면 산티아고까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고, 결국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고, 무엇보다 예전에 왔던 도시, 그때는 차로 왔지만 이제 그 도시를 당당히 걸어서 왔다는 것이기에, 우리는 레온을 많이 기다리고 있다.


걷는 것이 얼마나 느리고 미련한 짓인가.

달리는 차를 보면, 뻥 뚫린 시원한 아스팔트를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다 보면 그런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느릴 수는 있어도 절대 미련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매일매일 온몸으로 걷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걷기의 견고한 미학을 안다.

길이 있다. 우리는 걷는다. 그러면 오늘의 목적지인 지점에 성당과 마을이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숙소는 호텔이다. 수도원을 개조한 멋진 별 4개짜리란다. 감기 때문에 선택했다. 붉은 기와와 함께 창 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정원이 아름답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고 큰 수건으로 닦는다. 알베르게에서는 할 수 없는 호사이다. 제발 오늘의 '사치' 대가로 감기가 나았음 좋겠다.

저녁의 메뉴델디아는 25유로의 코스요리인데 매우 품위 있는 맛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정도면 두세 배의 가격보다 더 나올 것 같은데, 우리나라 물가, 특히 제주도의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알겠다. 여기 떠나오기 전 제주도에서 10일 머물렀을 때 경험한 그 물가는 너무 높았다. 까미노를 걸을 때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숙박비, 식비가 저렴하다는 것, 제주도도 그랬음 좋겠는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오늘은 K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경제적인 고통으로 힘든 삶이 조금씩 나아지길, 주님을 향한 신실함을 아시오니, 지켜주시길.


14코스 저지예술정보화마을~한림항 19.1km

바람이 가장 강한 날, 아침에 춥다는 느낌까지 든 날, 바람막이 하나 덧입고 걷다. 종일 바람이 분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이어서 뜨거운 햇빛 염려는 없는 날이다. 제주의 구름은 어느 순간 분위기를 근사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다.


저지오름을 옆에 두고 걷다. 한번 오른 오름은 정이 깊어져서 다음 날까지도 눈길이 그윽하게 간다.

돌밭길을 거쳐, 숲길을 거쳐, 논밭길을 거쳐...

숲길을 빼고는 다 포장도로라 걷는 분위기가 조금 덜하긴 하다. 여기가 다 흙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 할 소리다. 어쨌든.


숲길엔 가을이 온 것 같다. 제주에서 처음 느낀 가을이다.

금릉포구 피어 22. 시간 느긋한 여행으로 오면 '테왁'에서 쏟아져 나오는 해물들을 시키겠으나, 친구에게 그 재미와 맛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우리는 해물라면과 맥주를 주문한다. 젊은이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 준 점심을 역시 감탄하며 먹다. 우리는 왜 맛없는 게 없을까 이러고 먹는다.

남은 거리가 약 9킬로미터인데, 시간은 세 시간 정도 남았으니 시간 여유 있다. 협재 해변에서 맨발로 걸으면 되겠구나 했는데, 바람이 너무너무 심하다. 몸이 날아갈 것 같다.


금릉해수욕장을 지나 협재로 가는 길은 돌길이다. 바닷가를 따라 그 돌길로 가게 하는 것은 좀 심하다. 잘못하면 다리 삐끗할 수 있겠다. 발목이 긴장되고 무릎도 긴장된다. 조심조심 걷는다.

이런 길이 많고 19킬로 정도 되면, 이 코스는 상급이라 해야겠다. 오름이 없는 대신 길이 길고 편치가 않다. 특히 어르신들은 아주 조심해야 할 길.


협재해수욕장 모래사장이 그렇게 작았나? 맨발로 걷기는 간단하게 끝내다. 그리고 한림항으로. 수십 척의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바람이 엄청 난 날. 제주의 바람을 확실히 안 날. 그런 바람이 분 날 해변을 걸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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