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아군’을 지나 대체코스로 걷는다. '사아군'은 멋진 유적을 가진 곳이라 하는데 아치형의 커다란 성문이 인상적이다. 성문 옆의 성당은 유료. 까미노 마을에 있는 성당은 웬만하면 다 규모도 크고 멋있다. 유서 깊은 곳은 이야기도 전해진다만 나는 큰 관심이 없다. 미술과 건축물에 관심이 있거나 천주교신자라면 좀더 유의미하게 성당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순례자의 동상이 인상적이어서 기념으로 한 장 찍고 걷다. 이후의 길은 대체코스인데, 원래 길은 흙길인 것 같으나 길이가 길고, 우리가 가는 대체길은 도로 옆길로 나란히 걷는 직선 코스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의 총길이가 여기저기 다른 것은 아마 이런 대체길이 있어 그런 것 같다.
숙소는 2층에 알베르게, 1층은 Bar인데 숙소가 역시 깔끔하다. Bar도 분위기 있어 맥주 한 잔, 샤워는 큰 수건을 빌려 끝낸다. 감기는 다 사라진 듯하다. 그는 밖에서 ‘레온’과 ‘아스트로가’까지 숙소 예약을 끝낸다.
이제 중반 이후로 접어든다. 뿌듯함이 차오른다. 잘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영어로 스페인어로 막 수다떠는 소리들이 소음으로 들릴 때가 있다. 내 마음이 여유 있을 때는 아무 불편 없이 자유로움으로 들리기도 한다. 만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걸을 때가 가장 편하다. 걸을 때가 가장 힘들기도 하다. 하루하루 천국을 경험하며 천국을 향해 걷는다. 처음부터 천국만을 바라보면 이 길은 정말 힘들 것이다. 이 하루하루를 즐기며 걸을 수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가 된다. 이 길에 ‘아무것도’라니,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있다. 꽃, 나무, 곡식, 하늘, 구름, 차, 돌멩이, 풀, 수많은 생명들, 사람들... 하루하루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즐기며 마시며 걷다보면 천국은 어느덧 가까워 오리라. 현재, 지금을 살라....
오늘은 그를 위한 기도. 주님을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는 삶을 살길,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하게 함께 오래 살 수 있었음, 돌아갈 학교에서 충전된 힘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늘 감사드리며.
18-1코스 상추자도 11.4km
드디어 추자도!
제주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약 1시간이다. 배멀미약도 먹고 의자에 기대 출렁이는 몸을 맡기니 감개무량이다. 추자도엔 처음이다. 추자항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아담하다. 숙소에서 나온 차에 짐만 맡기고 바로 걷기 시작이다.
예쁜 추자초등학교부터, 최영장군 사당을 지나 봉글레산으로. 그리고 내려와 다시 저기 꼭대기 하늘과 맞닿아 있는 '나바론의 요새'로 향한다. 그쪽은 올레길은 아니다만 낚시꾼이 이름 붙인 그곳은 추자도에 오면 안 갈 수 없는 길이라는데, 절벽 위로 정자 하나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거기를 간단다. 끝없이 오르막으로 이어진 나무계단길, 숨이 가쁜 길, 일단 올라온 곳에서 뒤돌아보기에 어지러운 길, 올라 간다.
정상에서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다. 그러나 이어진 추자등대로 내려가는 절벽길은 아찔하다. '나바론의 요새'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알겠다. 저 아래 바다와 여러 모양의 작은 섬들.... 남해의 다도해구나. 섬의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나 이어진 풍경은 그냥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날씨도 기가 막히구나. 맑고 쾌청하다. 섬과 섬을 잇는 추자교를 지나 돈대산 정상으로 오른다. 여기 올레길은 상급 코스 맞다.
약 4.5킬로 남았다는데 '나바론 요새'에 진을 빼서 버스 시간에 맞춰 바로 질러 간단다. 그러나 우리는 남은 올레길 다 걷기로 한다. 버스는 한 시간 늦게 타면 되고, 그냥 가면 추자도 길의 1/3은 못 걸은 것이 될 터, 언제 또 오겠니. 여행 갈 때 이 말을 할 때가 있다. " 언제 또 오겠니..."
안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예초 포구를 지나 예초 기정길이라 하는 곳을 지난다. 바로 옆은 낭떠러지인데 그 사이로 난 길은 숲길처럼 오솔길로 이어져 있어 하나도 무섭지 않은 다정한 길이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사진 찍고 감탄하고 느끼고 걷는다.
‘눈물의 십자가’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가 제주 유배 갈 때, 두 살짜리 아들 황경한을 놓고 떠났다는 곳, 거기 십자가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본 내용이다. 그곳이다. 황경한의 묘지 앞에 있는 망원경으로 보다. 올레길은 아니고 아래로 주욱 내려가야 한다. 황경한의 묘지에서 잠시 쉬다. 부자의 동상이 있고, 마리아와 예수의 피에타도 있다. 이 평화로운 공원에서 잠시 복잡한 상념에 빠진다.
종교와 신앙, 아직도 나를 흔들고 있는 주제이다. 이 땅에 천주교를 들여오기 위해 외국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사람들, 그들을 역적으로 몰고 고문하고 목숨을 빼앗고 가족을 멸절시키고자 했던 사람들, 어느 쪽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신앙의 힘으로 살고 아들을 살리고 많은 이들을 섬긴 '어머니이자 신심 깊은 신자'인 '정난주'를 기억하고자 한다.
신양항으로 오기까지의 길은 내리막이 심하다. 올라오려면 죽음이겠다 싶게 데크로 된 길이 끝이 없다. 그러나 길이 좋다. 이렇게 걷는 것이 좋다. 신양항에 도착하니 4시. 버스를 타고 약 20분 걸려 우리가 묵을 민박집 앞에 내리다. 방은 2인실, 오랜만에 온돌이다. 숙소 앞은 배들이 묶여 있는 항, 아주 조용한 추자항, 추자마을이다. 저녁은 조기 반찬, 추자도 조기가 그리 유명하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