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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만시야/ 하추자도

by 순쌤

베르시아노스~Mansilla de las Mulas 26.3km

어젯밤 옆 침대의 두 남녀께서 끝없는 사랑의 속삭임을 속닥속닥하시는 통에 잠을 설쳤다. 다행히 10시쯤 그녀가 1층 자기 침대로 내려가서 괜찮았으나 속이 부글거려 죽는 줄. 혹시나 적극적인 그녀가 그를 그리워해 다시 올라올까 봐 신경 쓰였다. 오늘 걷는 오전 중에 몇 번 마주쳤으나 인사도 안 했다. 대신 친절한 미쿡인 마이클 부부는 볼 때마다 서로 인사. 부인은 내 친구와도 비슷하고 안젤리나 졸리를 닮아 매력적이다. 마이클은 63세라는데 십 년은 젊게 보이고 사람 좋은 미소와 인상이 어째 미쿡인 같지 않게 편한 느낌이다. 내게 미쿡인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는 것일까.


오늘도 ‘만시야’까지 도로 옆으로 난 일직선의 길을 걷는다. 가로수가 우람하면 그늘이 크게 져서 좋고, 심긴 지 얼마 안 된 작은 나무는 작은 그늘이라도 나눠주고 있어 걸을 만하다. 해는 늘 그렇듯이 오늘도 뒤에서 따라와 주고 바람이 선선히 불어준다.


17km쯤 걸어 점심 먹을 마을에 도착, 빠에야를 시킨다.

“쌀을 '푸욱 완전 잘' 익혀주세요. 뽀르빠보르...”

영어 스페인어 몸어를 섞어 얘기해 놓고, 알아듣는 것 같아 기대하고 있었는데, '완전 뜨거운’ 빠에야를 내왔다. 물론 쌀은 덜 익었다. 다시 한번 "푸욱 익혀주세요.", 손님이 우리뿐인 관계로 부탁을 했다. 조금 더 익혀왔다. 이 정도면 그냥 됐다. 12유로. 비싸다. 어제 숙소에서 메뉴델디아를 10.5유로 주고 코스요리로 와인과 함께 맛있게 먹었으니, "빠에야 비싸요."


오늘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 'Gaia'는 맘에 딱 든다. 방 두 개에 18개의 침대, 우리 침대만 비어있는데 예쁜 침대 시트를 씌어 놓았고 우리 짐을 침대 곁에 미리 갖다 두었다. 이렇게 센스 있고 고마울 데가... 얼른 씻고 햇살이 너무 좋아 빨래를 하다. 그러나 햇살에 푸욱 데일 뻔, 낮의 그 태양과 다르다. 빨래 잘 마르겠다. 소중하게 들고 다니던 라면 1개를 끓여 먹기로 하다. 맥주를 사러 나가려는데 주인장이 냉장고에서 캔 두 개를 꺼내준다. 지갑을 여는데 주인장은 손사래를 치며 순례자용이란다. 이런... 이런 곳이 있나. 숙박비가 비싼 것도 아닌데 그 가격에 맥주를 그냥 먹으라고 냉장고에 넣어놓다니... 나중에 블로그를 보니 주인이 돈을 벌려는 의지가 없는 듯하다며... 그렇네. 맥주에 라면 안주를 먹다. 주방에 둘이 앉아 라면 냄새 풍기고 있다. 아, 천국이 이런 것이라며 또 막 행복해하다...

진정, 뭐 바랄 게 있을까.

이제 4시도 안 됐다. 얘네처럼 낮잠 한숨 자야겠다. 씨에스타.

내일은 레온으로 간다. 레온만 가면 나는 정말 감개무량일 것이다. 10년 만에 오는 도시, 레온에 가면 산티아고까지 1/3 정도만 남은 것이다.


18-2 코스 하추자도 9.7km

아침을 먹기 전에 동네 한 바퀴 돌다. 해가 비추는 추자항이 둥실 움직이는 것 같다. 동네는 조용하고 깨끗하다.

조기매운탕으로 아침을 먹다. 난 조기로 끓인 매운탕은 처음인데, 사람들이 어릴 때 엄마가 끓여준 맛이라고 좋아한다.


버스를 타고 신양항으로 가다. 거기서 출발, 추자도 지도가 머리에 익혀지니 오늘 길은 좀 익숙하게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봉우리 하나를 오르는 길로 시작한다. 나무 계단이 많다. 그러나 제주 쪽의 바다를 보면서 가는 길이 절경이다.

오늘의 핵심은 ‘수덕도!, 사자암이라고 한단다. 사자모양의 바위가 하추자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는 모양이다. 마치 섬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바다 위에 외롭게 혹은 늠름하게 떠있는 그 바위가 자꾸 시선을 돌리게 한다. 계속 사진을 찍는다. 하늘과 바다색이 어울리고 그 섬의 모양이 현실감이 없다.


끝없이 오르고 또 오르고 나타난 ‘대왕산 황금길’, 이 길의 하이라이트란다.

정상의 정자에 북을 달아놨다. 울려라!

곳곳의 정자에서 쉬멍 또 걸멍하며 추자도를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와 함께!

좋은 길을 보면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생각난다. 그 길이 좋은 길이다. 추자도 길! 힘든 것은 힘든 것이지만, 한없이 멋지다. 다시 걸어도 좋을 길이다.

묵리슈퍼에서 오늘의 점심 김밥을 펼치다. 맥주 한 캔을 안주로.

그리고 나타난 숲길을 걸으며 노래를 듣는다. 김동률 '출발', 노래처럼 우리는 흥겹다. 여행이란 이런 것일 게다. 흥얼거림, 설렘, 호들갑, "나는 떠나리 저 넓은 세상으로..."


추자도 왜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조용한 거야?

밭농사 논농사를 안 지어서? 차가 많지 않아서? 관광객이 주로 걷는 올레꾼이나 낚시꾼이어서?..... 이렇게 추측하며 이야기하며 걷는다. 오르막이 많지만 길이 나쁘지 않다. 주변 풍경이 확 트였다. 숲길, 오솔길, 바닷길, 벼랑길...다 좋아.

너무 좋은 것을 많이 봐서 감동의 색이 덜할까 염려도 된다. 올레는 사실 어떤 길이든 좋다. 아스팔트와 차와 함께 가는 얼마간의 길을 빼면 다 좋다.


다시 숙소 쪽으로 오다. 다 온 거다. 시간이 두 시간여 남는다. 후포에 있는 갤러리를 찾아간다. 추자도가 고향인 작가가 추자도를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갤러리다.

"사진 기가 막히지 당연히. 누가 찍어도 그럴걸. 추자도라는 원판이 그리 아름다운데...'

그러나 외지인이 잘 볼 수 없는 장면, 해무가 낀 수덕도, 일몰의 섬들... 용눈이오름의 그 사진들처럼, 애정이 담긴 사진은 멋있다.


추자도를 떠난다. 다음에 오면 추자도에 조금 더 천천히 머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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