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재미없고 하루 종일 찻길과 함께 걸은 길. 어젯밤 숙소에서도 찻소리 때문에 잠을 뒤척였는데 오늘 종일 찻소리 쌩쌩쌩 왕왕왕... 그동안 얻었던 영혼의 휴식과 기쁨과 설렘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듯하다. 영혼이 상처받은 길, 두들겨 맞은 것 같다. 달리는 차는 정말 힘겹다. 나는 그동안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간신히 숙소에 도착, 급하지 않은 리셉션의 여인, 한참을 기다리다가 우리 차례. 그러나 맡기고 온 짐이 오지 않음을 알다. 리셉션에서는 영어가 잘 되지 않는 통에 완전 중구난방, 짐운반 회사 ‘하코트렌’과의 전화, 레온 숙소와의 전화, 여기도 역시 영어가 되지 않아 대략 난감.
결과는 이렇다. 하코트렌 짐운반 센터는 오늘 아침 우리가 머물렀던 호스텔엔 들르지 않음, 호스텔 로비엔 우리 배낭 하나가 떡하니 있음, 호스텔 사람들은 짐이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음, 하코트렌의 영업시간은 끝나서 직원은 다 퇴근했음, 원하면 내일 갖다 주겠음.
하나같이 무책임과 무신경들... 화가 치밀다. 그래 오늘은 정신 막 가는 날이다.
알베르게의 화끈한 여주인이 해결해 준다.
해결 내용은 이렇다. 여기 택시 회사에 연락해서 택시 한 대를 그 숙소에 보낸다, 짐을 가져온다, 비용은 30유로, O.K?
방법이 따로 없다. 당근 O.K! 앤드 땡큐!
열을 받은 머리 식히려 맥주 한잔 마시면서 짐을 기다린다. 숙소는 맘에 든다. 지금 나는 짐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책꽂이에 한글로 된 책이 보인다. 김남희의 산티아고 까미노 책! 반가워라. 책에는 김남희 사인도 들어있다. 직접 주인에게 준 책인 것 같다. 주인에게 책을 들고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김남희가 여기 와서 준 책이란다. 김씨는 그 전에 여기 머물면서 일을 도와준 인연이 있다고. 오호, 마음이 풀어지는 이 마음!
길을 걸으면서 오늘 같은 사소한 문제가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큰 문제는 아닌 거지. 어제 그렇게 좋아했던 레온은 오늘 나를 끝까지 힘들게 하는 배신의 도시가 됐다. 숙소에서부터, 여기 산마르틴 마을 올 때까지 정말 힘들게 했다. 다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햇살 작렬에, 찻소리에, 영혼 없는 포장도로에, 도시의 소음에 힘들었던 게다. 순례자들에게 아주 잔인한 최악의 길이라 기록해두고 싶다. 책에서 이 구간은 차를 타고 건너뛰어도 좋을 구간이라고 했던 것을 이제 이해한다. 마이클이 차를 타고 건너뛴다는 말이 생각난다. 다음에 온다면 이 구간은 건너뛰는 걸로.
그래도 오지랖 넓은 화끈한 아주머니 덕에 해결되어서 다행이다. 레온의 호스텔의 아저씨, 우리가 일찍 떠난다니까 아침에 식당을 일찍 열어줘서 고마웠는데, 너무도 친절하여 성당 한 번 더 들렀다 그 앞길로 간다고 해도 굳이 다른 길을 계속 친절히 알려준 아저씨, 정작 손님이 맡겨둔 배낭이 오후까지 그냥 로비에 있는데도 대책 없이 있을 수 있는 그 우둔함을 어째야 할까.
Orion 알베르게에서 만난 영국인 ‘트루디’를 만나다. 온 몸으로 반가워한다. 이런 표정과 몸짓을 보면 참 기분이 좋다.
주인은 씻지도 못하고 앉았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타월도 있고 샴푸도 준비된 독실을 쓰겠냐 한다. 4유로만 더 내란다. 생각할 것 없이 땡큐! 드디어 짐은 얌전히 오고, 씻고 좀 편히 눕다.
저녁은 와인과 함께 빅빠에야로 나온다. 한국인 커플이랑 같이 앉다. 앞에 일본인 아저씨 두 명, 아일랜드 청년 둘, 그리고 트루디,
트루디는 술을 좀 먹은 듯, 아까 낮에 우리 짐이 안 온 걸 알고 걱정하더니, 우리 짐이 왔냐고 자꾸 묻는다. 벌써 왔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막 다른 얘기하다가 심심하면 한 번씩,
"근데 킴! 짐 왔어?"
으~ 63세라 했나? 외국 사람들도 술 먹으면 자꾸 했던 말 또 하는구나...
아일랜드 청년들이랑 메세타를 지나올 때 ‘보리밭에 이는 바람’ 영화 생각났다 했더니 반가워했다. 자기들도 그랬다고. 영어가 좀 됐으면 많은 얘기 나누고, 한비야 김남희는 저리 가라로 글도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허풍 떨다. 물론 속으로.
곤하다. 자러 들어온다. 식당 쪽에선 10시 넘게 노래 부르고 떠들고 하는 소리. 10시가 넘어도 훤하다.
16코스 고내포구~ 광령1리 사무소 15.8km
바닷가 길은 검은 바위들을 보며 빠른 걸음으로 걷다.
구엄포구, 검고 너른 바위에 만든 염전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소득원이 되었다는데, 1950년 이후에는 관광지로 흔적만 남겨있다고. 이 멋진 길을 예전에 왔을 땐 무심코 지나쳤다. 올 때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다.
내륙으로 들어간다.
수산봉. 오르막오르막, 그리고 돌아 내려가니 수산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그네가 매달려있다. 커다란 소나무에 매어둔 그네, 바로 밑은 비탈, 저 아래는 저수지. 난 그런 것이 좀 무섭지. 친구는 신나게 구른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 그네에서 사진 찍고 인스타에 올리는 핫한 곳이라고 봤다면서. 그래? 이렇게 높게 길을 걷고, 참 장하네! 했더니, 우리 올라온 곳으로 열심히 올라와서 찍는 게 아니고, 바로 돌아 내려가는 길이 있고 거기까지 차가 다니는 도로이고, 흠, 차를 타고 와서 세워놓고 그네 타고 사진 찍는다는 거지?
뭐, 별로 안 장한 걸?
항파두리.
삼별초가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토성이 잘 다듬어져 있다. 이 길은 좋은 길로 기억에 남아있다. 하여 오늘 올 때도 기대했다. 계절 따라 풍경도 느낌도 다른 것이 당연하구나... 좋다.
햇살은 따갑다. 토성을 따라 걷다 올레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던 메밀밭을 발견! 감탄하며 요리조리 사진을 신나게 찍다. 참 많이 보는 메밀밭인데 볼 때마다 우리는 탄성을 지른다. 단순한 건가? 그토록 예쁜가?ㅎ
숲길로 들어서고 다시 마을길로 들어서고, 또 숲길에 이 마을 저 마을길.... 돌고 돌고, 종점이 나올 듯 말 듯 인내를 시험한다.
드디어 광령초등학교, 그리고 앞에 '윈드 스톤'.
다시 오고 싶었던 작은 북카페다.
다 걷고 난 후 여기 앉아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지. 따사로운 햇살이 창 안으로 들어오던 그 평화로웠던 기억에 다시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