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스트로가의 호텔과 마을 정황을 봐서 1박을 더 할 수도 있다. 그냥 빨리 가고 싶기도 하고 좀 쉬어 가고 싶기도 하다. 1/3만 가면 되는데...
아침에 트루디와 마주친다. 또 짐 얘기를 한다. 이런...
“트루디, 내가 어제 그대에게 다섯 번도 더 얘기했어. 짐 택시로 왔다구요! 어제 정말 기분 좋아보이더군요.”
“호호호 그래요? 술을 먹어서... 말이 많아지고 내가 뭔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겠고... 어쩌구 저쩌구....ㅎㅎㅎ” 이 아주머니 귀여워라. 결국 아침을 잘 먹고 화끈한 주인아주머니와 화끈하고 아쉽게 인사를 나누고 트루디와 셋이 나온다.
역시 날씨 화창하고 오늘 낮에도 아마 쨍할 것이다. 걷다가 걸음 빠른 트루디는 또 보자고 하고 먼저 앞선다. 어제만큼의 길만 아니면 좋다. 찻소리, 아스팔트만 아니면 모든 거 o.k!
일요일 이른 아침이다. 차는 드물다. 기분 좋게 시작한다. 오솔길도 나온다. 마을도 나온다. 주스 한 잔 마시고 화장실도 해결하고 다시 기쁘게 걷는다.
스페인에서 제일 길다는 다리를 건너다. ‘오르비고’ 강의 다리, 돈키호테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는 다리, 아무리 봐도 멋지다.
‘아스트로가’로 오는 길, 오르막 내리막으로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어제보다 훨씬 좋다. 하늘은 파랗고 오솔길, 자갈길, 흙길, 그리고 고개를 헉헉 올라왔을 때, 거기 나타난 ‘오아시스’! 수박과 온갖 과일을 펼쳐놓고 순례자들이 먹기 좋게 잘라놨다.
이 더위에 수박이 시원하고 맛이 정말 달다. 가격은 도네이션, 이렇게 멋지고 고마울 데가 있을까. 오늘도 배운다. 누군가에게 기분 좋게 감동을 주며 쓸 수 있는, 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기! 맛나게 먹고 기부하고 씩씩하게 오다. 멀리 ‘아스트로가’가 보이는 십자가. 더 멀리 설산, 참 멋지다. 5km정도 남았단다.
아스트로가는 언덕에 있다. 힘겹게 올라오니 예상치 못한 넓은 시청 앞 광장과 커다란 성당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광장 바에서 온화한 햇살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저 아래 힘든 길을 통과한 이들인가? 작은 도시가 완전 새롭게 다가온다. 일단 숙소를 찾으러 광장을 지나 까미노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카테드랄이 떠억, 그 옆에 유명한 ‘주교의 방’이라는 가우디 건물이 떠억, 그 바로 앞에 호텔이 떠억 있다. 호텔 이름은 그 이름 찬란한 ‘가우디!’, 리셉션 아가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와우, 숙소가 정말 좋은 위치에 있네요!” “땡큐!”
“근데 저게 가우디예요?” “Si”
“와우, 저거 볼 수 있는 방이었음 참 좋겠어요.”
‘흠, 뭐 그쯤이야..(제 권한이죠 뭐)’ 라는 몸짓과 눈빛, 웃는 그 아가씨 참 예쁘다.
“땡큐!”
아가씨는 정말 가우디 건물을 온전히 조망할 수 있는 근사한 방을 주었다는....
3성급 이 호텔은 화려하지는 않은데 품위가 풀풀 풍겨난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며 침구들이 완전 맘에 든다. 창문을 열어젖히니 카테드랄! 주교의 방! 파라솔 펼쳐진 거리! 가우디 건물을 황홀히 바라보는 관광객들! 여유 있게 앉아 즐기는 거리의 바! 이 모든 것이 자유로운 풍경이 되어 우리 방 앞에서 펼쳐진다.
여기 이틀 묵기로 바로 결정. 리셉션으로 내려와 물어본다.
"방을 보는 순간 하루 더 묵고 싶어졌어요!"
예쁜 웃음을 가득 지으며 가능하단다. 좋아라.
시청 앞 광장의 Bar로 나가 션한 맥주와 치킨 날개! 으매, 또 천국과 행복의 시간, 아는 이가 지나갔으면 좋겠다. 막 아는 체 하고픈데... 그때 정말 한국인 젊은 커플이 짠 나타난다.
“어이, 한국인!” 우리는 즐겁게 수다를 떨며 흥에 겨워 한 잔 한다. 기분 오른다.
한국에 소식을 전하다. 그냥 잘 걷고 있다는 것만. 더 이상 전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누군가는 힘겨운 시간일 수 있는데... 미안한 아쉬움. 내일 박물관과 성당을 둘러보고 푸욱 쉴 예정이다. 남은 일정을 위한 준비다.
17코스 광령사무소~간세라운지 관덕정분식 18.1km
무수천, 걱정없는 천? 물이 없는 천? 그래 걱정 없이 걸어보자. 깊은 계곡이었을 텐데, 물이 조금 고여있는 정도. 외도 월대, 천이 흘러 바다로 흘러가는 곳, 조그만 고기들이 노닐고 있고 조금만 더 가면 외도 바다가 나온다. 거기부터는 계속 바다... 현사포구에서 이호테우해수욕장으로. 맨발로 걷는다. 모래만 나타나면 맨발로 걸을 생각이 나고, 제주의 흰모래 위를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이 덤 같이 즐겁다.
제주도의 머리, '도두봉'으로 가는 길.
제주 도심으로 오면서 뭔가 도시적인 냄세가 폴폴 난다. 예전에 공사중이었던 정상오르는 길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여기는 공항이 가까우니 비행기가 착륙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오늘 보니 이륙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게 수시로 바뀌는 모양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손을 흔드는 장면을 찍어주는 것이 여기서의 놀이다.
또하나 놀이. 어영공원을 지나 바닷가에 서서 북쪽의 하늘을 요렇게 초점을 모아 집중하여 바라본다. 어느 순간 그 하늘에서 하얀 점이 나타난다. 그것이 조금씩 커져 빛이 되고 그것이 서서히 비행기가 되어 나타난다. 아주 큰 비행기가 바로 머리 위로 날아가고 공항으로 착륙하는 거다. 저쪽 하늘에서 나타나는 하얀 점을 누가 먼저 보나...이런 게임도 한다. 빠를 땐 1~2분만에 한 대씩 나타나는 비행기를 보는데, 잠시 그러고 논다. 은근 재밌다.
용연다리를 거쳐 ‘바라나시책골목’은 그냥 눈으로만 보고 지나치다. 혼자라면 들어가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도 좋으련...그냥 간다. 복잡한 제주 시내로 들어온다. 언제 봐도 후덕한 느낌의 관덕정 나타나고, 이후는 길이 아주 구불거려서 잠시 한눈 팔면 올레 리본을 놓친다. 도장을 찍어야하니 종점을 찾아간다.
이번 올레는 도장을 찍으며 확실히 길을 마무리하는 재미. 재미라고 해야하나, 하나의 의식이라고 해야하나. 뭔가 해야할 것 같은 이런 의례이다. 이번만 하면 끝이다. 앞으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리. 이렇게 시작 중간 끝을 꼭 찍을 필요는 없겠다. 이런 의미로 숙제를 마무리 하는 것이 뿌듯하고 대견하다는 것. 오늘 17코스를 끝내면 이제 올레는 5개 코스가 남았다. 한라산이 마지막 넘어야할 고지이다.